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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믈리에라는 직업의 진실 -‘ 메트레스 연인’(가시마 쓰토무, 2004)의 소믈리에 가타기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지금 우리나라는 전례 없는 불황을 겪고 있다. 그 불황의 정확한 이름은 ‘스태그플레이션’인데, 그것이 이른바 ‘MB노믹스’ 때문인지 ‘촛불집회’ 때문인지는 경제학자들의 판단에 맡겨놓기로 하자. 어찌 되었건 경제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은 매일매일 피부에 와 닿는 진실이다. 하지만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워도, 혹은 역설적으로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뜨는’ 사업도 있다.

내가 알기로 IMF 시대에 최고의 급성장을 기록한 분야가 ‘등산장비업체’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에 사표를 던진 사람들이 평일에도 산을 찾게 되는 바람에 예기치 못했던 호황을 누리게 된 사업이었다. 와인 산업 역시 이례적인 호황이다. 최근 국내 최대 규모의 대형 할인마트에서 놀라운 보고서를 내놨다. 사상 최초로 와인 매출액 총합이 소주 매출액 총합을 넘어선 것이다. 새로운 와인 가게가 출현했다는 소식은 이제 일종의 일기예보처럼 들린다. 내 주변에서도 거의 일주일 단위로 와인집 창업의 소식이 들려오니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이러한 현상이 정치적 혐오 혹은 무관심의 반작용인지, 아니면 단순히 국민소득 상승의 결과인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어찌 되었건 와인 산업 붐의 결과로 새롭게 떠오르는 인기 직종 중 하나가 바로 ‘소믈리에’이다.
문제는 이 직종에 대한 과대평가 혹은 과대망상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소믈리에는 대단한 전문직이다. 그들은 어떤 와인을 따라주든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맞힌다.

소믈리에는 또한 예술가인 동시에 지식인이다. 그들은 엄청난 고소득을 올린다. 덕분에 와인업계에 뛰어든 젊은이들 중에는 장래 희망이 소믈리에인 사람도 많다. 과연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서운하거나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냉정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소믈리에란 와인 산업 시스템 중 제일 마지막 고리에 해당하며, 해당 업소에서 고객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와인을 파는’ 세일즈맨을 뜻한다.

국내의 와인 교육기관들에서는 이 소믈리에 자격증을 지나치게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도 그런 것을 하나 가지고 있다. 심지어 소믈리에를 넘어서서 ‘와인 전문가’니 ‘마스터’라는 증명서도 취득했다. 하지만 그것이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믈리에와 관련해 내가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는 나의 와인 스승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는 내게 이렇게 조언했다. “소믈리에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고, 소믈리에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라.”

소믈리에라는 직종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로는 가시마 쓰토무 감독의 ‘메트레스 연인’을 꼽을 수 있다. 사실 이 콩글리시적 영화 제목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영화의 원제는 ‘메트레스(Maitresse)’이고, 그것은 프랑스어인데 우리 말로는 ‘정부(情婦)’에 해당하는 것이다.

『실락원』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미리 말해 두지만 솔직히 영화는 별로다. 다만 주인공 가타기리 슈코 역을 맡은 가와시마 나오미의 농염한 섹스신이 그런대로 볼 만하고, 일과 사랑 혹은 결혼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현대적 해석도 나름대로 음미해 볼 만하다.

가타기리는 도쿄 긴자에서 잘나가는 프렌치 레스토랑 ‘앙주(프랑스어로 ‘천사’라는 뜻)’의 수석 소믈리에다. 그녀는 대학교수인 유부남 도노(미타무라 구니히코)의 정부이기도 한데, 그와의 사랑이 더없이 관능적이며 흡족하긴 하지만 시시각각 원인 모를 공허함에 몸서리친다. ‘메트리스 연인’은 몇 가지의 실존적인 질문을 던진다.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은 다른 것인가? 유부남의 정부란 어떤 존재인가? 사랑한다면 반드시 결혼해야 되는가? 사랑과 일 중에서 택일해야만 한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와타나베 준이치는 『실락원』의 작가답게 과격한 답변들을 제시한다. 그 답변들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그것을 여기에 열거하는 것은 일종의 스포일러밖에 안될 것 같아 자제하기로 한다. 정히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보라. 이 영화의 답변에 동의할 것인지 여부는 온전히 당신 몫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소믈리에로서의 가타기리다. 그녀가 ‘앙주’에서 와인을 서빙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소믈리에의 교과서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 코르크를 따는 방식, 디캔팅할 때의 자세 등은 한마디로 퍼펙트(!)하다. 저것이 과연 연출의 힘인가 하고 잠시 의심했지만 가와시마 나오미의 인터뷰를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제 몸 속에 흐르는 피는 대부분 와인일 거예요.” 그녀는 열렬한 와인 애호가였던 것이다.

가타기리가 사랑 때문에 일을 소홀히 하게 되었을 때 ‘앙주’의 매니저는 단호하게 말한다. “너 그 따위로 일하다가는 네 후배한테 자리를 빼앗기게 될 거야.” 과연 그녀의 후배 소믈리에는 수석 소믈리에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가열찬 노력을 기울인다. 업소에 남아 있는 와인 재고량을 파악하고, 특정 와인의 개성을 달달 외우고, 자신만의 단골 손님을 만들기 위해 갖은 아양을 다 떤다. 천박한가 혹은 얄미운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냉엄한 직업의 세계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소믈리에가 해야 될 일이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가타기리가 자신의 근무 태만을 반성하며 늦은 밤 홀로 행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장면이다. 여기 회전하는 원반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적 자주 보았던 번데기 장사의 찍기판을 연상해도 좋고, 그냥 단순히 오디오의 턴테이블을 연상해도 좋다. 가타기리는 다섯 종류의 와인을 다섯 개의 잔에 따른 다음 그 원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안대로 가린다.

그 다음엔? 원반을 제멋대로 돌린 다음 한 잔씩 맛을 보고는 그것이 어떤 와인인지를 알아맞히는 연습을 밤새도록 계속한다. 그것이 ‘셀프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다. 가타기리가 좋은 정부인지 나는 모른다. 그녀가 택한 길이 옳았는지도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녀는 훌륭한 소믈리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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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씨는 ‘심산의 와인예찬’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심산의 시나리오 워크숍’ 등을 썼으며 현재 심산스쿨(www.simsanschool.com)에서 시나리오와 와인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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