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용.허삼수.허화평 공소장 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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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피고인은 80년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사회안정을 위하여 군이 적극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뒤 5월18일 광주에서의 시위가 확산되자 전두환.이희성.황영시와 함께 전투병과사령부에서 시위상황을 보고받고 언론보도를 통제하면 서 공수부대의 시내투입과 증파로 시위를 조속히 제압할 의도로 ▶5월19일 시민들이 대규모로 가세,과잉진압에 항의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김안부(34)가 전두부열상등으로 사망하고 ▶5월20일 3공수여단병력 1천3백92명을 광주에 증파,시위진압에 투입하여 많은 광주시민들이 부상하게 하고 김재화(25)등은 총상을 입고 사망하고 ▶5월21일 시위대에 의해 철수를 요구받은 11공수여단 대대장들로부터 필요한 대책을 세워줄것을 건의받았으나 이를 무시,12시쯤 3공수여단 병력이 시위대에 발포,운전사등이 사망하고 13시쯤 11공수여단 병력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으로 발포하여 박민환(26)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5월26일 오전 전두환을 방문하여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을 지원받고 오후2시쯤이희성을 방문하여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지원받아 오후9시이들 장비및 특전사에 있던 편의복을 갖고 광주비행장에 도착,예하부대원을 격려한뒤 오후 11시쯤 3공수여단 특공대를 도청에 투입해 무장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진입하여 전남도청을점령하는등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비상계엄 해제,전두환 퇴진 및 민주화추진을 요구하는 광주학생.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등 폭동하여 내 란함과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여 반란한 혐의다.
피고인은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허화평.이학봉.권정달.정도영과 수시로 만나 논의한끝에 전국계엄실시.비상기구 설치.국회해산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시국수습방안으로 정리,실행했다.또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를 통해 공직자 숙정계획을 입안하고 정부 각부처에 숙정대상자의 명단을 통보해 숙정하도록 하는 한편 「언론계 정화 정비계획」을 전두환에게 추천,언론인 9백33명을 해직되게 하고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안보보고 회의에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도록 한다음 ▶80년10월초 보안사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언론건전육성방안보고서」를 전두환등과 함께 보고받고 이에 동조,지방지를 1도 1사원칙에 따라 10개로 통합하고 공.민영 방송구조를 공영방송 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신당창당 작업에도 관여,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지역구 조직책을 확정하는등 집권당 창당작업을 진행하게 했다. 피고인은 중요임무종사자로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등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하여 내란함과 동시에 반란한 혐의다. ***허화평 피고인은 허삼수.이학봉.권정달.정도영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기로 하고 80년5월4일 보안사에서 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정호용등과 함께 권정달로부터 방안을보고 받고 실행에 동의하는 한편 한용원 정보처 1과장에게 비상기구 에서 일할 교수를 알아보라고 지시한 혐의다.
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안보보고회의에서 새 대통령으로 전두환을 추대하도록 해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했다.
피고인등은 그 후에도 집권에 이르는 과정에서 취한 조치들을 헌법에 반영하거나 완결하고 언론을 순화시키며 신당을 창당하여 정계를 재편하는등 향후 자신들의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계엄상황을 계속 유지하면서 제5공화국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개정함으로써 제10대 국회가 해산됨과 동시에 입법회의가 10월29일부터 81년4월10일까지 국회권한을 대행하도록 했다. 또 언론통폐합에도 허삼수등과 함께 관여,지방지는 1도1사,방송은 공영방송체제로 개편하는등 피고인은 내란중요임무 종사자로서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하여 내란함과 동시에 반란한 혐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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