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한국 통해 마약 원료 밀수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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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8년 3월 13일 파키스탄 카라치항. 정박 중인 한 화물선에 파키스탄 마약정보국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배에 선적된 컨테이너에서 이들이 발견한 것은 14t의 무수초산(Acetic Anhydride).

생아편으로 마약인 ‘헤로인’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될 촉매제로 인터폴 등 국제 수사당국과 유엔마약범죄국(UNODC) 등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는 물질이다. 과산화수소로 위장한 무수초산은 한국을 출발해 아프가니스탄 반군 탈레반의 핵심 거점인 ‘님로즈’로 향하던 길이었다. 인터폴은 한국에 이 사실을 알렸고 경찰과 국정원이 공조 수사에 나섰다.

◇탈레반 마약 원료 경유지 된 한국=경찰청 외사수사과 국제범죄수사대는 4일 아프가니스탄인 K씨(47)와 인도인 P씨(55)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들여온 12t의 무수초산을 경기도 안산시의 한 화공약품 공장에 보관해 놓고 엔진오일로 위장해 이란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님로즈로 밀수출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K씨는 경찰 수사에서 “탈레반의 지시로 무수초산을 님로즈로 반출하려 했고 반출 이후 탈레반 거점으로 넘어가려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K씨를 탈레반 조직원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K씨가 아프가니스탄인으로 위조한 여권을 가지고 입국했고, 탈레반의 주요 테러자금 조달 경로인 ‘하왈라’를 이용했으며 통화 내역 등을 볼 때 탈레반 조직원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왈라는 아랍인들의 사금융으로 9·11 테러 당시 알카에다가 하왈라를 통해 자금을 조달해 유명해졌다.

K씨는 파키스탄 국적의 모포 수입상으로 2000년 이후 20여 차례 한국을 다녀갔으며 2004년 위조 달러를 유통시킨 혐의로 이듬해 강제 추방됐다. 올해 5월 아프가니스탄인 여권으로 다시 입국했다.

경찰은 K씨가 무수초산 조달 총책이었던 H씨(42)를 대신해 한국에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H씨는 3월 카라치항에서 무수초산이 적발되기 직전 출국했고 인터폴에 의해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붙잡혔다. 현재 한국 송환 절차를 밟고 있다.

그는 파키스탄인 오퍼상으로 1994년부터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파키스탄인 오퍼상들을 포섭해 무수초산 밀수입을 주도했다. 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5차례에 걸쳐 50t의 무수초산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넘겼다. 인터폴의 요청 이후 수사에 들어간 경찰은 H씨를 놓쳤지만 그에게 포섭된 3명의 파키스탄인 오퍼상과 김모(52)씨 등 4명의 화공약품 도매상을 검거했다.

◇세계 최대 규모=경찰은 “이번에 적발된 총 62t의 무수초산은 국제 마약 거래 사상 최대”라고 밝혔다. UNODC에 따르면 현재까지 적발된 무수초산 가운데는 2004년 이란을 통해 님로즈로 운반하려다 걸린 12t이 가장 많은 양이었다. 무수초산 62t은 시가 3억6000만원 정도다.

62t의 무수초산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헤로인은 30여t이다. 경찰 관계자는 “헤로인의 가격은 나라마다 차이가 나는데 국내의 경우 0.3g의 헤로인이 4만원 정도에 유통된다”고 말했다. 8조2667억원가량의 헤로인을 만들 수 있는 셈이다. 그는 “한국은 마약 청정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 무수초산 조달책들이 한국을 경유하면 감시를 덜 받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UNODC는 “아프가니스탄은 동남아시아 아편 생산지인 ‘철의 삼각지대’ 붕괴 이후 최대 아편 생산국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8200t의 생아편을 생산해 전 세계 생산량의 92%를 차지했다. 생아편을 원료로 820t가량의 헤로인과 모르핀을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탈레반은 양귀비 재배 농민과 유통업자로부터 지난해에만 1억 달러가 넘는 세금을 거둬 조직 운영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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