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중국문화지도 <23> “베이징 시민에 패션 감각을 입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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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변화 속도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특히 빠르게 변하는 패션과 트렌드는 더욱 그렇다. 중국 출신 수퍼모델 두쥐안(杜鵑·25)이 느끼는 속도감은 이렇다. “내가 사는 곳인데도 (해외 컬렉션 출장 등으로) 몇 달 만에 집에 돌아오면 나조차도 ‘여기가 베이징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 있다. 새로 생긴 건물, 최신식 패션몰, 여기에 입점한 해외 패션 브랜드 중엔 나도 못 본 것이 있을 정도다.” 베이징 사람까지도 낯설게 느낄 만큼 베이징 패션은 역동적으로 변신 중이다.

◇베이징은 ‘입문’, 상하이는 ‘도약’ 단계=“협회에 비주얼 머천다이저(VMD) 위원회를 신설한 지 이제 3년째다. 점점 패션을 보는 안목이 까다로워지는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 패션 관련 종사자의 재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국패션협회 쑤바오옌(蘇葆燕·42) 부주석의 설명이다. VMD는 상품을 특색있게 매장에 진열하며 브랜드의 이미지에 가장 적합한 매장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을 뜻한다. 패션 브랜드 매장에선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이런 VMD 관련 재교육이 시작됐다는 것은 중국, 특히 베이징의 소비자들이 이제 막 패션에 눈뜨기 시작했단 얘기다. 우리나라의 경우 VMD는 10여 년 전 개념이 도입돼 지금은 지방 소도시의 매장에도 적용되고 있을 정도다.

물론 이것만으로 ‘중국 전체’가 갓 패션에 입문한 수준이라고 평가하긴 힘들다. 대륙의 넓이 만큼이나 중국 내 각 지역의 문화 수준도 다르기 때문이다. 상하이 최고급 백화점 중 하나인 주광(久光)의 루사오후이(盧少慧·49) 총경리는 “홍콩 사람이 소화하기 어려운 옷도 상하이에선 적극적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도시 홍콩보다 취향이 더 국제적이고,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을 만큼 과감한 상하이 사람들의 패션 감각에 대한 얘기다. 상하이 국제패션연합회 부회장인 왕신위안(王新元)은 중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의 이런 특징을 비교하면서 오늘날 중국의 패션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역사적으로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서 중국 문화를 대표해 왔다. 반면에 상하이는 중국 내에서 근대화 이후 금융을 포함한 경제와 교역의 중심이 돼 온 지 오래다. 패션을 문화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선 경제 수준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현재 상하이는 그런 바탕을 갖추고 있다. 베이징은 전통의 문화 중심으로서 경제 발전과 함께 패션 수준도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공통점이라면 두 도시 모두 패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상상 이상으로 뜨겁다는 것이다.”

왕 부회장의 설명처럼 최근 몇 년 사이 해외 명품 패션 브랜드는 앞다퉈 중국에서 대규모 행사를 벌이고 있다. 올해 3월 이탈리아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브랜드 창립 80주년 기념 행사를 태생지인 이탈리아 피렌체가 아닌 상하이에서 열었다. 펜디의 경우 지난해 10월 베이징 근교의 만리장성에서 모델 88명이 패션쇼에 서는 대규모 패션쇼도 열었다. 당시 펜디가 소속된 LVMH그룹에선 베르나르 아르노 그룹 회장을 비롯해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크리스찬 디올의 시드니 톨레다노 회장 등 그룹 내 주요 인사 모두가 베이징에 총출동하기도 했다. 왕 부회장은 “베이징과 상하이 모두 패션 행사로 정신이 없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루이뷔통 등 명품 브랜드와 보그 같은 주요 패션 잡지에서 벌이는 패션쇼 등 각종 파티와 행사가 줄지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 시민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혀라”=베이징에선 매년 봄, 가을 두 번씩 패션쇼가 열린다. ‘뉴욕 컬렉션’ ‘파리 컬렉션’ 하는 식으로 ‘차이나 패션 위크’라는 이름의 행사를 치르는 것이다. 1993년 설립된 중국 패션협회(CFA)는 97년부터 주최해 왔다. 회원 수만 1200명이 넘는 거대 조직인 CFA는 패션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관련 학과 교수를 포함해 VMD, 모델, 패션쇼 기획자, 패션잡지의 발행인과 편집인 등 현업 종사자들도 가입돼 있다.

CFA가 베이징에서 여는 패션쇼를 해외의 유명 도시들처럼 ‘베이징 컬렉션’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뭘까. 협회의 쑤 부주석은 “우리 협회가 중국을 대표하기 때문에 베이징이라는 도시 하나로 한정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향후 다른 지역 개최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패션에서도 중국의 중심은 ‘수도 베이징’이란 자부심에서다.

아직까지 관(官) 주도의 대규모 행사 개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국의 환경은 패션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또 하나의 이유다. 패션 관련 잡지 등을 통해 유명세를 얻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알렉스 왕(본명 왕페이이, 王培泥·34)은 아직까지 ‘차이나 패션 위크’에 참가한 적이 없다. 그는 “굳이 참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유명 영화배우 자오웨이(趙薇·32) 등 스타급 연예인과 부유층 여성 고객들을 상대로 고급 맞춤복을 만드는 그는 따로 매장도 없이 주상복합 아파트를 사무실로 개조해 쓰고 있다. 한 벌에 최소 5000위안(약 90만원)의 옷을 만드는 그는 “베이징 사람들에겐 패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해야 할 단계다. 나이 든 사람들은 부유해도 패션에 너무 무지하고 30대들은 관심이 지대하다. ‘차이나 패션 위크’에 참가해 화려한 패션쇼를 여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더 제대로 된 옷을 경험하는 게 더 중요한 때다”라고 말했다.

중국 내에서 40여 개의 백화점을 운영하는 바이성(百盛) 백화점 그룹의 최고운영경영자(COO)인 류징두안(劉敬鍛) 역시 베이징의 패션을 이렇게 평가했다. “아직까지 ‘베이징 디자이너 중엔 누가 최고’라고 말하기 힘들다. 가장 돈 많은 사람들은 과시욕 때문에 해외 명품만 산다. 국산 브랜드도 좀 있지만 명품의 트렌드를 배워서 하는 수준이다. 상하이에서 패션을 이해하는 소비자가 10명 중 4~5명이라면 베이징은 아직 2~3명 정도다.”

베이징·상하이=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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