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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희망 이야기] 무료 이발 이갑종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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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이갑종씨가 8일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김순아(93)할머니 댁을 방문해 이발을 해주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부산시 동대신동에 있는 '부산탕 이발소' 주인 이갑종(55)씨의 가훈(家訓)은 '건강'이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어려운 이웃에 머리를 깎아주는 것이고, 아프면 그걸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죠." 가훈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그는 16년째 쉬는 날이 없다. 이발소가 쉬는 매주 수요일마다 양로원.보육원이나 독거 노인.소년소녀 가장의 집을 찾아다니며 무료로 머리를 깎아주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가위손'이란 별명까지 얻게 됐다.

李씨가 '가위손 봉사'를 시작한 것은 1989년 초. 이발소 종업원으로 자리 잡아 끼니 걱정에서 해방되면서부터다.

"산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간신히 나왔지만, 저보다 사회적 뿌리가 약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더라고요."

그러던 어느날 깨끗이 세탁한 헌옷 등 위문품 몇점을 들고 경남 밀양의 한 행려병자 보호소를 찾았다가 무릎을 쳤다. 제대로 이발을 못해 덥수룩해진 머리에 눈길이 간 것이다.

"내가 가장 자신있는 이발로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그때부터 그는 매주 한번씩 이발소가 쉬는 날이면 이발 도구를 챙겨 부산과 경남의 불우이웃 시설을 찾아나섰다. 온종일 수십명의 머리를 깎다 보면 손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라는 핀잔을 들은 적도 적잖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웃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머리를 깎은 사람들의 '고맙다'는 한 마디에 피곤은 봄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600여회 이발 봉사를 하면서 줄잡아 2만명의 머리를 손질해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설.추석 외엔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집안일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봉사를 하지 못한 때는 일주일 내내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다 실망했을 사람을 생각하니 빚지고 갚지 않은 듯한 죄책감이 들었어요."

도배 일을 하는 부인 정정임(53)씨도 처음엔 눈을 흘기다 몇년 전부터는 일감이 없는 날엔 그를 따라나선다.

李씨가 자신의 이발소를 차린 95년엔 주변의 다른 이발사와 미용사 15명과 '일심(一心) 봉사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제겐 수요일에 머리를 깎아주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가위질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한 봉사활동을 계속할 겁니다."

부산=김관종 기자<istorkim@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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