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남, 어느 날 ‘킬러’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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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액션을 느린 속도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기법은 ‘매트릭스’의 불릿타임(Bullet Time), 즉 느린 속도로 날아가는 총알을 허리를 한껏 젖혀 피하는 그 유명한 장면에 비견될 만한 시각적 쾌감을 안겨준다. 영화란 역시나 상상력의 문제지만, 이 영화는 액션 역시 상상력의 문제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별 볼일 없는 20대 회사원이 액션전사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일종의 판타지다. 주인공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는 사무실에서는 허구한 날 팀장에게 구박을 당하는 데다, 동거 중인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워도 알고도 모른 척 지내는 무기력한 처지다.

이런 웨슬리 앞에 느닷없이 매력적인 액션전사 폭스(앤절리나 졸리)가 나타나고, 이유도 모른 채 웨슬리는 한바탕 추격전·총격전에 휩쓸린다. 알고 보니 폭스는 중세시대 직조공들이 결성한 이래 1000년을 이어져온 비밀 암살조직의 단원. 조직의 대장인 슬론(모건 프리먼)은 웨슬리 역시 암살자의 피가 흐르는 남다른 능력자라는 걸 알려준다. 웨슬리가 태어난 직후 집을 떠나 감감무소식이었던 아버지가 실은 최근 살해된 최고의 암살자 미스터 엑스(데이비드 오하라)로, 그를 죽인 조직의 배신자 크로스(토머스 크레시만)가 웨슬리도 노린다는 얘기다.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웨슬리는 충동적으로 암살단에 합류한다. 웨슬리의 선배 격인 폭스는 가혹한 수련을 통해 웨슬리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시킨다. 말끝마다 ‘미안합니다’를 달고 살던 소심한 남자 웨슬리는 좌절감을 딛고 망설임을 넘어 냉철하고 의욕적인 암살자로 변해간다. 단연 회사원용 대리만족감이다.

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는 본래 러시아 출신. 이번 영화로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그의 연출력은 액션도 액션이지만, 내레이션을 곁들여 회사원 웨슬리의 좌절감을 표현하는 사소한 디테일에서도 솜씨를 발휘한다.

캐릭터와 액션의 재미에 비하면 막판에 등장하는 일종의 반전은 차라리 싱거운 편이다. 조직은 1000년 전부터 전해지는 거대한 베틀의 씨실과 날실을 해독해 암살 대상을 정하곤 하는데, 웨슬리는 자신이 죽여야 할 암살 대상이 실은 조직 내부의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전에 이르기까지의 전개 역시 아주 정교하지는 않은데, 이 영화 자신의 장기인 액션으로 이를 상쇄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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