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섬유미술가 장연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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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에게 ‘공포의 공간’인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을 장연순 작가는 돌돌 말린 쪽빛 섬유 설치 작품들로 채웠다. 제목은 ‘늘어난 시간, 매트릭스’(2008). 결혼을 하지 않아 딸린 가족 없이, 대학과 작업실을 오가며 30년 넘게 반복 작업을 하며 지낸 내공이 오롯이 쌓여 있다. [사진=박종근 기자]

사유의 공간5, 2003, 아바카를 쪽염색 후 재봉, 56×56×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마닐라산 마 섬유인 아바카를 쪽물에 담갔다 뺐다 하며 염색한다. 대여섯 번쯤 물들이면 옥색, 스무 번쯤은 반복해야 마음에 드는 짙은 파란빛이 나온다. 수작업이기 때문에 색은 그때그때 다르다. “쪽은 한순간도 같은 색이 나오지 않아 매력적인 재료”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렇게 염색한 아바카를 다려 성근 씨실과 날실 올을 일직선으로 가지런하게 만든다. 다림질 후 재단해 재봉질한다. 반복 또 반복하기가 열두 단계다.

지난해 7월 국립현대미술관의 ‘2008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뒤 이화여대 장연순(58) 교수는 욕심을 부렸다. 미술관 중앙홀과 제2전시실을 채우기 위해 지난 1년간 총 1000야드(약 1㎞)의 아바카를 염색했다. 염색하고, 다리고, 재단하고, 빳빳하게 풀먹이고, 재봉질하고…. 1㎞에 달하는 천을 놓고 열두 단계씩을 반복해 작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섬유들은 중앙홀에 꼬물꼬물 기어가는 소용돌이 형으로, 전시실 바닥에 깔린 속 빈 입방체로, 전시실 벽면에 걸려 뒷벽에 파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설치 작품이 됐다. 성근 마 섬유로 만든 작은 사각형 집으로는 바람이 통하고 빛이 통한다. 자신을 비우며 만든 분신이다. 총 200여 점이 나온 회고전이다. 정작 작품은 극도로 미니멀해 시간이나 수공의 흔적이 절제돼 있다.

‘올해의 작가’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내 생존 작가가 유일하게 열 수 있는 개인전이다. 1995년 시작됐다. 관장 이하 미술관 학예직 총 13명이 동원돼 1년에 1∼3명씩 한국 미술의 ‘대표 선수’를 뽑고 있다. 장연순씨는 21번째 ‘올해의 작가’다.

도예가 김익영·윤광조씨 선정(2004년) 이래 공예 분야에선 두 번째, 섬유미술가로는 처음이다. 미술관은 “2008 올해의 작가는 소외된 분야의 활성화를 촉진하고자 공예 분야에서 안배했다”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그래서 작가에게 대놓고 물었다. ‘비인기 장르’‘안 팔리는 작가’로 힘들지는 않았느냐고.

장씨는 그저 “다른 생각은 안 해요. 작업을 반복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그 때문에 지금껏 붙잡고 있는 거지요”라고 말했다. 반복의 수공으로 늘려온 시간들은 바닥에 빳빳하게 서 있는 아바카들이 대변한다. 전시는 다음달 20일까지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에는 전시와 연계된 체험교실이 열린다. 02-2188-6114.

글=권근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작가에겐 창작 의욕을 높이고 관객에겐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주자는 취지로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주도해 매년 의미 있는 활동을 한 작가를 선정한다. 1995년 설치작가 전수천(61)씨를 시작으로 이듬해에도 설치작가 윤정섭(58)씨가 선정됐다. 회화에 황인기(57·97년)·이영배(52·2000년)·노상균(50·2000년)·권옥연(85·2001년)·전혁림(92·2002년)·한묵(94·2003년)·정점식(91·2004년)·이종구(54·2005년), 한국화에 권영우(82·98년)·김호석(51·99년)·서세옥(79·2005년), 조각에 정현(52·2006년), 회화 및 설치에 전광영(64·2001년)·곽덕준(71·2003년), 건축에 승효상(56·2002년), 사진·영상에 정연두(39·2007년)씨가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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