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물갈이'와 迎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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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벌써부터 신문들은 총선 이야기로 바쁘다.전국의 선거구를 모두거론하면서 선거에 입후보할 사람,그만 둘 사람,밀려나는 사람,그래도 뛰겠다는 사람.모두 정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면서 「물갈이」와 「영입」이라는 말은 어느새 유행어처럼 돼버리고 말았다.여당도,야당도,서울에서,지방에서 모두 물갈이한다고 한다.그리고 새 사람을 영입한다고 한다.참신하고,양심적이고,덕망있는 새 사람들을 모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름도 오르내린다.누구는 영입교섭 대상이고,누구는 이미 어느 지역구를 맡기로 확정됐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텔레비전 탤런트와 뉴스 앵커맨들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이미 낯익은 이름이기 때문이다.연속극에서 이런저런 역을 하던 사람,매일 저녁 9시마다 심각한 얼굴로 나라 소식을 전하던 사람.이 사람들이 모두 국회로 간다는 것이다.
특히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전하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그만 둔다는데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다.그것도 한두명이 아니고 네명이나 사표를 냈고,앞으로 더 나올지도 모른다고 한다.물론 가는 사 람은 가도 오는 사람은 온다.이제까지의 앵커맨은 정치라는 직업으로 전업(轉業)신고를 내고 텔레비전 스크린에서 사라졌지만 또 새 얼굴이매일 저녁 9시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라 소식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과거와 같지는 않다.많은 시청자들은 새로 뉴스를 전하는 사람들도 어느 때가 되면 국회로 가기 위해 앵커맨의자리를 떠날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아니 국회로 가기 위해앵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도 된다.
불신(不信)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그렇다고 정치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전직 언론인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민주사회에서는 무슨직업 출신이건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하고,또 그렇게 하는 것이오히려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 이다.
다만 질문이 하나 있다.왜 미국이나 영국처럼 성숙한 민주사회에서는 「물갈이」나 「영입」이라는 유행어가 없는 것일까.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아직 국민속에 뿌리내린 정당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정당 보스(boss)마음대로 물갈이도 하고,보스 마음대로 인기있는 사람들을 「영입」해 마네킹처럼 내세우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부터 특정 정당에 가입해 있으면서 정당활동을 하다가 국회에 출마하는 것이 아니고 정당 가입은 생각하지도않고 있다가 국회의원 출마를 하기 위해 정당에 가입하는 것이 현실이다.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영국같은 안정된 민주사회에선 소속 정당의 지역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능력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의회에까지 진출하게 되고 총리까지 하게 된다.바로 마거릿 대처가 그렇게 했고,존 메이저도 그렇게 했다.물론 미국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식자층」에 속한다는사람들은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그러니까 자연히 정당은 정당안에서 성장해온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불가능하다.하는 수 없이 정당들은 정당을 세 운 창업주가 필요한 사람들을 골라 운영하는 결과가 된다.바로 이런 과정에서물갈이도 하고 영입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정당들도 국민속에 뿌리를내린 국민에 의한,국민을 위한,국민의 정당이 될 수 있을까.우선 시간이 걸린다고 본다.인스턴트 민주화는 없다.정당의 창업주시대가 지나가고 국민들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 야 한다.그러기위해서는 비약은 불가능하다.꾸준한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우선 단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정당들이 물갈이를 하고 새사람들을 모셔올 때 단순히 참신하고 덕망있다고 하는 당선 가능성에만 치중하지 말고 당이 추구하는 이상과 정책 목표에 진정으로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일 이다.이 말은유권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정당이 아무리 얼굴이 널리 알려졌고 참신하게 보이는 후보를 내세웠다 하더라도 정책 비전이뚜렷하지 못하고 설득력이 없다면 귀중한 한표를 던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총선은 아직 3개월이나 남아 있다.벌써부터 과열되는 것같아 걱정이다.그러나 유권자들의 자세를 가다듬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해도 이르지 않다고 본다.
(사회과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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