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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앞에는 창이 있고, 뒤에는 방패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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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정신이 혼미한데 머리에 번개라도 맞은 느낌이었다. ‘번쩍!’ 하고 눈이 뜨였다. 귀가 열렸고, 머리가 깨었다. 타이거 우즈와 로코 미디에이트의 US오픈 연장 결승을 보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던 17일 새벽이었다.

“그가 위대한 건, 마이클 조던처럼 위대한 건, 공격과 수비를 모두 완벽하게 한다는 데 있죠”-밥 코스타스(NBC방송 스포츠캐스터)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지나친 친미적 방송으로 우리 귀를 거슬렀던, 그러나 미국에선 여전히 최고의 스포츠캐스터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벽 2시30분쯤이었고, 두 선수는 6번 홀에 있었다. 코스타스의 한마디를 염두에 두고 경기를 봤다. “우즈가 수비를 한다? 골퍼가? 어떻게, 얼마나 잘하기에?” 그 과정에서 알게 됐다. 우즈를 정면에서 보면 그는 파워풀한 장타자, 공격적 성향이라는 창을 들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의 등뒤에는 언제든 그를 탄탄하게 받쳐 주는 수비 능력, ‘방패’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황제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이클 조던이, 조 디마지오가, 로저 페더러가 그랬던 것처럼 공수를 겸비한 선수가 완벽하며,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우즈는 그날 초반 리드-중반 역전 허용-막판 위기 극복-연장 우승이라는 로드맵을 그렸다. 상대와의 맞대결이면서 자신과의 싸움. 무너뜨리느냐 무너지느냐의 접전이었고, 희비가 순간순간 교차됐기에 더 드라마틱했다. 우승의 일등공신을 따지자면 마지막에 그를 구해낸 18번 홀 버디가 맨 앞에 서야 하겠지만 그때까지 1타 차 간격을 유지시켜 준 건 수비 능력이었다. 우즈는 12번 홀까지 고작 네 홀에서만 파 온에 성공했다. 그러나 지키는 퍼팅을 기막히게 성공시켰고, 그래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우즈는 이날 버디를 얻어내는 공격형 퍼팅보다 파를 지켜내는 수비형 퍼팅에서 돋보였다. 그날만은 그랬다. 그 수비는 미디에이트의 중반 상승세로부터 우즈가 무너지지 않게 해줬다. 그렇게 마지막 홀까지 왔고, 거기서 우즈는 창을 꺼내 버디를 잡고 연장으로 갈 수 있었다.

구기종목 관계자들은 말한다. 공격은 화려하고 여자친구를 만들어 주지만,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주는 건 수비라고. 올해 프로농구에서 통합 우승을 거둔 동부가 그랬고 그 기둥에 서 있는 김주성이 그렇다. 득점(새넌), 어시스트(김태술), 리바운드(레더), 3점슛(방성윤) 등 주요 부문 1위에 동부 선수는 없다.

그러나 김주성은 블록슛(2.2개) 1위다. 지난해 챔피언이면서 올해도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SK 야구가 그렇고, 수원의 축구도 그렇다.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건 공격도 아니고 수비도 아니다. 공격과 수비의 조화다.

스포츠는 인생에 비유된다. 골프도, 야구도, 축구도, 농구도, 마라톤도 그렇다. 그렇지 않을 게 없다. 인생의 단편이니까. 우즈의 우승은 또 하나의 교훈을 주었다. 인생에도 공격과 수비의 리듬이 있고 그 조화가 필요하다는 걸.

수비는 지루하고, 하기 싫고 재미가 없지만 아주 중요하다는 걸. 정상이라는 고지까지 가는 동안 든든히 자신을 지켜 주는 덕목이라는 걸.

이태일 네이버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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