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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합의사항 지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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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북 간 '신뢰의 성'은 약속을 하나하나 지킴으로써 단단하게 쌓아지게 된다. 북한은 최근 남북 장성급회담을 비롯한 경제 관련 회담의 개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남북 양측은 청산결제, 철도.도로 연결, 임진강 수해 방지 등 3개의 실무협의회를 3월에 개최하자는 데 합의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북측은 회담 개최 날짜에 임박해 장소 변경 또는 날짜 재조정을 요구했다. 남측의 경기도 파주에서 개최될 청산결제 실무협의회는 '탄핵 사태로 인한 남측 정국의 불안'을 이유로 개성으로의 회담장소 변경을 요구했고, 북측의 개성에서 개최될 철도.도로 연결과 임진강 수해방지 실무협의회도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이유로 회담을 연기시켰다.

*** 화해 무드에 찬물 끼얹어

북측이 회담 개최를 합의해 놓고 회담에 임박해 이를 무산시키는 행위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북측은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15차례나 회담을 연기시키거나 무산시켜 왔다. 회담의 무산 이유도 한.미 합동 군사훈련과 미국의 대북정책, 그리고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등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우리의 내부조치, 우리 측 특정 인사들의 발언 및 남북관계에서의 불만 등 다양하다. 심지어 제5차 장관급회담의 경우에는 회담 당일 아침에 구체적 설명도 없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서울에 못 오겠다는 일방 통보를 하기도 했다.

다수의 북한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실 뒤에는 갑작스러운 정세 변화를 일단 관망하면서 그들의 내부 결속을 다지고, 민족공조를 내세워 반미감정을 확산하고, 남측과 미국 측을 압박해 추후 회담에서 협상의 입지를 높이겠다는 의도 등이 깔려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들이 과연 북측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되풀이되면 북측을 도우려는 우리의 따뜻한 마음이 점점 멀어지게 되고, 6.15 공동선언의 주요 사항인 남북 화해협력 활성화에도 걸림돌이 됨을 북측은 알아야 한다.

6.15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은 북측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끼리'하는 '닫힌 공조'가 아니다. 6.15 공동선언은 남북 화해협력 선언, 한반도 평화 선언, 민족통일 선언이다.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면서 평화를 정착시켜 나가는 가운데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공동선언 이후 남북한 간의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남북 간 왕래 인원이 1만 6000여명을 넘었고 교역 액수도 7억달러를 넘어섰다. 남북 경협의 심화.발전에 따라 군사부문의 균형적 발전이 필요하다. 교류협력 수준에 걸맞은 한반도의 평화를 확보해야 한다.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물론이고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완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협의하기 위한 군사회담도 개최돼야 한다.

항상 명분을 내세우는 북측에서 남북 간의 조그마한 합의사항도 지키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남북 화해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토대는 남북 간의 믿음과 신뢰다. 북측은 자신들의 신의없는 언행이 대화하고 교류.협력하려는 남측의 명분과 의지를 약화시키며, 이에 따른 손해는 다시 부메랑이 돼 북측에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 서해서 우발 충돌 예방해야

이제 북측은 남북한이 합의한 조그마한 약속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북측은 비록 남측과의 약속 불이행이 내부에서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남측 당국과 국민에게는 부정적이며, 남북관계 발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머지않아 5월이면 본격적인 꽃게잡이 철이 된다. 지난 2월 초 개최된 제13차 장관급회담에서 서해상에서 우발적 무력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남북 장성급회담 개최를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북측은 2개월이 다 되도록 남측의 개최 제의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지난 시절 남과 북은 서해상에서 크고 작은 무력충돌을 경험했다. 2002년 6월에는 무고한 군인들의 인명피해가 컸다. 다시 한번 서해상에서 무력충돌이 있게 되면 남북 화해협력에 대한 남측 국민의 마음이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북측은 남북이 이미 합의한 장성급회담을 조속히 개최해 그간 합의 불이행에 따른 불신을 씻는 계기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 전 통일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