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무늬만’ 공모제 vs ‘아니면 말고’ 추천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세상에 인사만큼 중요하면서도 말 많고 탈 많은 일이 또 있을까. 투표로 뽑든, 시험으로 채용하든, 전문가 추천을 받든, 권력자가 뜻대로 임명하든 모두 수천 년에 걸친 고민과 지혜가 녹아 있다. 각기 장단점이 있어서 어느 하나만 최선이라 말하기 어렵다. 자리의 경중과 성격에 따라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사에는 늘 제도의 그늘을 파고드는 반칙이 성행한다. 엽관(獵官)운동의 유구한 역사를 상기해보라. ‘이불 속 인사’ ‘소파 승진’이 있듯 지위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임명권자라 해서 마음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속 잘 아는 내 사람 데려다 앉히고 싶지만, 지나치면 ‘코드 인사’요, ‘고소영 내각’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뽑히길 바라는 쪽의 간절한 바람 못지않게 뽑는 사람의 고뇌도 깊어만 간다. 내가 정말 원하는 인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탐탁지 않은 인간들이 잽싸게 줄 서는 게 세상 이치다. 밥상 차리면 초대받은 손님이 앉기도 전에 파리 떼가 먼저 달려들지 않던가.  

뻔한 얘기를 거창하게 늘어놓는 것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산하 기관장 인사를 앞두고 똑같은 고민을 했을 것 같아서다. 더구나 전임 정권이 임명한 기관장들을 유·무형의 압력을 넣어 막 밥상에서 밀어낸 참이다. 상당수가 무늬만 공모제지 실제로는 코드 인사로 자리를 꿰찬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인사를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추천제 인사 아니었던가. 공모제는 거물급이나 명망가가 응모를 꺼리는 폐단이 있다. 노무현 정권의 코드 체질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괜히 들러리로 나섰다가 체면만 구기려 들지 않았다. 문화부가 공모제에 추천제를 병행키로 한 것은 일단 잘한 결정이다. 그러나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미숙함과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면 참 안쓰럽다. 전 정권의 코드를 안주 삼기 전에 가장 초보적인 업무능력부터 기르라고 말해주고 싶다.

추천제가 갈팡질팡한 최근 사례는 예술의전당 사장과 국립오페라단 단장에 각각 내정됐다가 낙마한 김민(66·전 서울대 음대학장), 이영조(65·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의 경우다. 김민씨는 함께 추천받은 3명이 모두 고사해 홀로 남았다는 이유로 문화부로부터 임명을 거부당했다. 유인촌 장관과 따로 면담까지 했는데도 연극·뮤지컬계가 강하게 반발하자 처음부터 다시 절차를 밟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에도 예술의전당 사장에 응모해 12명의 지원자 중 3명의 최종 후보에 올랐었다. 당시 사장에 임명된 사람은 오랜 문화부 관료 경력의 신현택씨였다. 김씨 입장에서 보면 지난해에 떨어진 경력이 결격 사유일 수는 없다. 더구나 올해는 남들이 추천했지 본인이 나선 것도 아니다. 국내의 대표적 실내악단인 바로크 합주단을 28년째 이끌던 음악가를 한순간에 바보로 만든 처사 아닌가. 김씨는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냥 예술가로서 백의종군하겠다”고 심정을 밝혔다.  

작곡가인 이영조 교수는 성악계 일부가 “성악인이 단장을 맡아야 한다”며 임명에 반대하고 나섰다. 성악가만 오페라단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상하지만, 무엇보다 반대하는 이들 대부분이 오랜 지인이었다. P·K·J씨 등은 이씨의 창작오페라 ‘처용’에 주연급으로 출연했었다. “임명돼도 그분들과 의논하며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싸우겠는가. 물러서는 게 비겁해 보이기도 했지만, 왠지 추하다는 느낌이 들어 스스로 뜻을 접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어느 분야든 인재는 쉽게 길러지는 게 아니다. 더구나 원로는 인재에 오랜 풍상과 경륜이 더해져 만들어진다. 원로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데 문화부의 허술하고 데데한 일처리가 큰 몫을 했다.

이렇게 뒷감당도 못하면서 무엇 하러 기존 기관장들을 급하게 서둘러 내쫓았는지 모르겠다. 문화부는 너무 안이했다. 혹시 정치권력을 잡으면 문화권력은 덤으로 따라올 것으로 착각했던 것은 아닌가.

노재현 문화스포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