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로간군인들>3.도청앞 집단발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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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5.18기간중 54명의 사망자를 낸 전남도청앞 집단발포때 대부분의 공수부대원들이 사전에 실탄을 휴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최초 발포자는 11공수부대 한 지대장(일반부대의 소대장급)이었으며 발포직전 한 장교가 상부에 철수를 건 의했다가 묵살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공수부대의 발포는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철수하겠다」고한 약속을 어기면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와 공수부대의 마찰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80년 5월21일 도청앞에 배치됐던 11공수여단 소속 金모(41.당시 대위),7공수여단 33대대 朴모(39.중위).35대대 崔모(38.중사),상무대 헌병대 鄭모(55.중사)씨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하자.
전날 공수부대원의 무자비한 구타로 희생된 시민 2명의 시체를목격,분노한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청앞으로 발길을옮겼다. 진압군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가톨릭센터앞은 11공수가,전남대의대병원쪽은 7공수가 배치돼 시위대의 도청진입을 저지하고있었다. 『어림잡아 군중이 10만명이상으로 불어났습니다.반면 계엄군은 1,000여명에 불과했지요.우리는 엄청난 시위대에 완전히 포위되자 완전히 겁을 먹고 있었어요.』 오전 11시.
『장교와 하사관에게 주둔지에서 가져온 경계용 실탄 10여발을지급하더군요.탄창만 받아두고 장전은 하지않았습니다.』(金씨) 『저희 대대는 출동하기전 이미 1인당 60발씩 실탄을 휴대하고광주에 내려왔습니다.도청앞에서 11공수와 첫 대면했을때 11공수는 이미 실탄을 휴대한 상태였습니다.』(朴씨) (이는 88년국회청문회에서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공수부대 병력이 실탄을 휴대했던 것이 아니라 도청앞에서 31사단 경계병들로부터 넘겨 받았다』는 증언을 뒤집는 것이다.) 이때 시위대와 진압군은 정오까지 철수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정오로 약속한 철수시간이 가까워오자 시위대는 일제히 「철수 5분전」「1분전」을 외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진압군 10여앞까지 몰려갔다.
『철수를 앞두고 충돌직전 상황에서 한 지대장(중위나 대위)이상부(여단장이나 대대장)와 무전연락을 통해 상황을 설명하며 철수의사를 타진했습니다.그러자 무전기에서 「철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이 새끼야,잔말말고 지켜」라는 육성이 흘 러나왔습니다.
』(金씨) 갈수록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공수부대원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고향의 봄』『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오후 1시쯤 시위 군중과 진압군의 「긴장된 평화」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시위대측 장갑차 돌진 『11공수쪽에서 「우」하는 소리가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시위대가 갖고 있던 장갑차가 진압군쪽으로돌진해 공수부대원 2명을 깔아뭉갠 뒤 저의 등뒤쪽으로 빠져 나갔습니다.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저도 옆으로 몸을 굴리지 않았다면 아마 압사당했을 겁니다.』(崔씨) 순간 11공수 한 지대장이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을 했다(鄭씨는 『나중에 부대에 복귀해 동료들에게 물어 이 부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총성이 들리자 도청앞에 있던 군중은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어 도청 건너편(시위 군중쪽)에서 칼빈소총 소리가 계속 들렸다. ***대학생 이마에 총맞아 진압군은 도청쪽으로 물러나 대대별로 저격수 10명씩을 선발,즉각 시위대에 조준사격했다.희생자가 속출했다.
『시위대와 진압군이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습니다.시위대는 잘 훈련된 공수부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도청 건너편 5층에서칼빈소총으로 사격하던 대학생이 이마에 정통으로 총을 맞고 밑으로 떨어지더군요.또 건물 2층에서 무슨 일이 벌 어지는지를 보려고 창문을 열던 50대 남자가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하는 것도 목격했습니다.』(鄭씨) 『발포는 엄청난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었습니다.하지만 하급자가 상급자의 명령없이 발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사전에 「위협하면 발포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봅니다.』(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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