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張起呂박사 聖者의 마음으로 仁術 한평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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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성탄절인 25일 소천(召天)한 장기려(張起呂)박사는 평생을 가난한 사람에게 인술(仁術)을 베풀다 간 「한국의 슈바이처」다. 북녘땅에 부인 김봉숙(金鳳淑.84)여사와 다섯남매를 남겨두고 차남 가용(家鏞.61.서울대의대 해부학과교수)씨만 데리고 월남한 張박사는 1911년 평북용천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32년 경성의전(현 서울대의대)을 졸업했고 40년 평양으로 가 51년 1.4후퇴때 남쪽으로 떠나올때까지 평양 도립병원 원장과 김일성대학 교수로 근무했다.
이때 張박사는 당에서 일방적으로 수여한 것이기는 하나 북한 최초의 의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월남한 張박사는 피난수도 부산에서 행려병자.영세민들을 위한 의료구호사업을 벌였다.그는 68년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靑十字)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청십자운동」을 전개한 한국 의학계의 정신적 지주였다.그의 삶은 학처럼 고고했다.그 는 『가난한사람을 돕는 것이 곧 인술』이라는 신조로 일해왔으며 「행려병자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평생을 희생과 봉사의 삶으로 일관한 張박사는 춘원(春園)이광수(李光洙)소설 『사랑』의 남주인공 「안빈(安賓)」의 실존모델로 유명하다.
그는 고학생인 제자가 찾아와 어려움을 하소연하자 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새이불을 내놓기도 했다.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는 환자들의 딱한 처지를 눈감지 못한 것도 그의 순박한 성품때문이었다.그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에게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그냥 도망쳐 살짝 나가시오』라고 귀띔해 주었다.
張박사는 부산에서 40여년동안 복음병원.청십자병원.고신(高神)의료원을 세우는등 사랑과 믿음의 인술을 펴면서 79년에는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상을 받았다.
그의 부인에 대한 순애보는 이산 45년의 한과 함께 가슴에서식을줄 몰랐다.
재혼을 권하는 주변사람들에게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위해 혼자 산다』며 수절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50년 12월 당시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국군장병등 응급환자들을 밤새 수술하고 있던중 병원3층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부인과 생이별해야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부인의 소식을 접한 것은 이산 41년만인91년. 재미교포인 조카며느리 임친덕씨가 북한을 방문,부인 金씨의 서신과 사진을 가져와 그에게 전해주었다.가슴속에만 묻어두고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부인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그의 가슴은벅찬 감격에 요동쳤다.
그후 서신왕래는 미국에 있는 육촌여동생 張혜원(66.전 미국컬럼비아대 화학과교수)씨를 통해 최근까지 3~4차례 이어졌다.
강계에 있는 부인의 소식에 이어 피붙이 자식들의 소식도 그에게 전해졌다.세명의 딸들이 평양에 있는등 자식들의 근황을 전해들은 것도 그맘때였다.그의 부인 金씨가 보낸 서신에는 남편에 대한 애틋한 정이 가득히 배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張박사는 서신내용을 가족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으나 인고(忍苦)의 세월을 겪어낸 감정의 일단을 간간이 내비치곤 했다.
김기평.강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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