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민주정치의 원초적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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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민주주의의 꿈이 불꽃처럼 터졌던 6월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6월이 오면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온 한국 민주정치의 향방에 대해 막연한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번 6월에도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큰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 ‘21년 만의 함성, 제2의 민주화’란 일간지의 표제대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20년 만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진통을 겪고 있다.

‘독재타도·호헌철폐’를 부르짖던 제1의 민주화 물결은 직선제 개헌과 자유선거를 통한 1987년 체제를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 ‘쇠고기 재협상’을 외치는 촛불의 물결은 한국이 이미 사이버 민주주의시대에 진입했음을 극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새롭게 활성화된 대중의 정치참여, 특히 거대한 집단행동을 통한 의사표시에 의해 통상적 정부 운영이나 정치 과정을 마비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란 원칙은 이번 6월에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러나 ‘제2의 민주화’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쇠고기 정국에서 비롯된 상황의 논리를 재검토하면서 한국 정치의 발전 과정을 짚어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국민, 즉 촛불집회에 참여한 국민들이나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가 한가지로 나라와 국민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상호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상대방보다 더 애국자이며 민주주의의 신봉자라고 자처한다면, 그리고 상대방의 애국심이나 민주적 신념을 의심한다면 처음부터 민주발전을 위한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에 더해 이번 쇠고기 협상 과정에서 있었던 정부의 실수는 이미 대통령을 포함한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문제의 진단보다는 이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 입장의 차이와 선택의 여지만 남아 있는 것이다.

촛불의 물결에 참여한 많은 국민이 주장하는 ‘재협상’은 한·미 간에 합의 서명된 사안을 일방적으로 폐기 또는 무효화하고 원점에서 새로 재협상을 시도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와 여당 측의 입장은 연령제한 없는 쇠고기 수입을 30개월 미만으로 제한하도록 보완 또는 추가 협상을 통해 사실상의 수정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갈림길 사이에서의 선택은 민주적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의 헌법적 의무와 직결되는 사안이며 동시에 대통령의 고민일 것이다.

대다수 국민의 바람, 즉 여론에 순응하려면 재협상을 결심해야 된다. 그러나 국가의 이익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의 헌법적 의무에 충실하려는 양심의 판단이 추가 협상 쪽으로 기운다면 어찌할 것인가. 과연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이 본인의 양심적 판단에 어긋나더라도 국민 여론에 순종해야 한다고 명령하려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제2의 민주화’가 내포한 민주정치의 원초적 딜레마인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누가, 어떻게, 국민을 대표해 중대 사안을 결정할 것이며 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한 헌법적 및 규범적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이러한 민주정치의 원초적 딜레마를 슬기롭게 우회하기 위해서는 ‘정치는 가능의 예술이다’라는 전제 아래 국가 운영의 책임을 공유하는 의회와 정당정치의 안정된 운영을 위해 타협의 정치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국민들의 직접 민주주의적 정치참여 능력은 인터넷의 활용으로 급격히 확충된 데 비해 정당과 의회정치는 파탄에 가까운 빈사 상태에 빠진 불균형을 그대로 노출하고 말았다. 이러한 불균형에서 말미암은 위험이 바로 제2의 민주화에 대한 위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쇠고기 수입 재협상의 문제 해결도 이러한 한국 민주정치의 발전 과정 차원에서 생각해 보는 국민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책임을 지려 한들 질 수 없는 ‘대통령 무책임제’의 폐단을 또 한번 겪으면서 그동안 무작정 대통령제만을 선호해 왔던 우리 국민들도 이 기회에 개헌 공포증에서 벗어나 정치의 대표성, 책임성, 효율성을 상당한 정도 가능케 하는 제도개혁에 동조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이버시대의 활발한 정치참여도 결국은 책임성의 기준을 존중할 때 진정한 민주화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겠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