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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기생은 최고의 ‘패션리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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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평양기생학교의 레뷰댄스. 레뷰댄스는 1913년 일본의 천승곡예단에 의해 처음 들어온 후 1920년에 기생의 레파토리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중앙에 남자 신사 차림의 스틱맨 역시 남장한 기생의 모습이다.

‘메밀꽃 필’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연인이었던 기생 왕수복. 가수출신인 그는 2003년까지 북한에서 활동했다.


20세기 기생들은 ‘패션 리더’였다. 신문물이 들어오던 시절, 기생들은 당대의 유행 스타일을 이끄는 주체 세력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패션’은 옛 것에 새로움을 더하는 창조적인 방식이었다. 당시 기생들이 리드하던 패션 스타일을 조목조목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서울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이 18일부터 7월10일까지 여는 전시회 ‘엽서 속의 기생읽기’전이다.

사진엽서에는 다양한 패션을 연출하는 기생들의 모습이 실려있다. 남보라색 치마에 흰 저고리, 그리고 노란 숄을 걸친 김농주라는 기생의 사진 엽서가 눈길을 끈다. 앞이마를 살짝 덮은 헤어스타일은 고스란히 ‘신여성’의 모습이다. 또 하얗게 칠한 얼굴과 분홍색 볼터치, 붉게 칠한 입술 등의 화장법은 당시의 유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는 단순히 ‘기생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생을 통해 ‘당대의 스타일’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최은수 학예연구사는 “사실 ‘기생(妓生)’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다소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런데 개화기 초만 해도 기생은 화려한 외모에 노래와 춤, 서화에 두루 능한 종합예술인이었다”고 말했다.

기생과 악사들의 모습이다. 엽서 뒷면에는 ‘1907년’이라고 씌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사진 엽서 속의 춤이 살풀이춤이란 사실이다.

기생은 가무를 하는 유녀(遊女)의 형태로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기생은 궁중연회에서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구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에 궁중의 관기가 해체됐다. 갈 곳을 잃은 기생들은 일제 강점기에 요릿집 등에서 공연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기생 조합이 만들어져 일본식의 권번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기생 사진엽서 150여 장은 박민일(강원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기증한 것이다. ‘옥션’ 등에서 취미로 옛엽서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박 명예교수는 “사진이 도입된 초창기에는 기생들이 카메라 앞에서 무표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1920년대, 30년대로 가면서 친근한 미소와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며 “어떤 면에서 기생들은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는 당시에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기생 왕수복(1917∼2003)의 사진도 공개된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연인이었던 그는 당대의 대중스타였다. 가수 출신이었던 그는 ‘무용의 최승희’처럼 ‘민요의 왕수복’을 꿈꾸었다. 12살 때 평양 기생권번의 기생학교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에 레코드 대중가수로 진출했다.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폴리돌 레코드사로 소속을 바꾸면서 ‘유행가의 여왕’으로 불리었다. 그가 부른 ‘고도의 정한’은 조선유행가 중에 가장 많이 불리었으며, 레코드 판매량도 최고를 기록할 정도였다. 당시 각 레코드사의 가수 쟁탈전도 평양 기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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