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울어버린 주부 백일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요즈음 친구나 이웃들에게 오전중 전화를 걸면 자동응답기가 그녀들의 빈집을 대신 지키고 있노라는 답신을 보낸다.
문화센터로,헬스클럽으로 모두들 떠나가버린 오전에는 나만이 이시대의 외토리가 아닌가 하는 소외감이 엄습해 쓸쓸하고 추워진다. 그러던 어느날 아파트 게시판에서 도봉구청이 주부 백일장을 개최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덜렁 신청하고 말았다.
며칠을 망설이다 안산의 상록수마을에 신접살림을 차린 남동생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그는『누님 회색빛 둥지속에 무슨 시상(詩想)이 떠오르겠어요』라며 운악산으로 가족 모임이나 다녀오라고했다. 남편과 동생부부의 열렬한 격려 속에 21개월된 막내를업고 도봉산 자락에서 펼쳐진 백일장에 참가,나의 문학적인 재능을 총동원해 졸작을 한편 제출했다.
글을 심사하는 동안 잠시 문학소녀로 돌아갔던 주부들을 위한 노래자랑이 열렸다.우리는 오랜만에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손끝에 묻은 김치냄새를 저 푸른하늘로 마음껏 날려 보냈다.
드디어 시상식.
장려상이나 가작도 황송한 나에게 준장원의 영광이 안겨졌다.떨리는 가슴으로 시상대위에 섰을 때 『올해는 아기 업은 수상자가많은데 내년에 수상하고 싶은 분들은 아기를 꼭 업고오자』는 사회자의 농담에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나의 볼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남들은「그까짓걸 가지고 뭘」할지도 모르지만….기쁨과 감격의 눈물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도봉산의 백일장은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나 자신을 구해준 새로운 충격이었으며 나의 삶에 상쾌한 아침을 여는 신선한 창(窓)이었다.
정희숙 〈서울도봉구창1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