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괘씸罪와 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섭섭함이 모여 마음 속에서 굳어진 것을 우리는 자기가 놓인 처지에 따라 두가지로 다르게 부른다.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윗사람,복수를 거사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힘센 존재가 끼친 섭섭함이 쌓인 것은 한(恨)이라고 부른다.응징( 膺懲)이나,최소한 복수(復讐)를 한번 시도해 볼만한 상대자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배반해 생긴 응어리는 괘씸이 된다.괘씸은 괘심(掛心;마음에 잊지 않고 항상 걸어 둠),즉 괘념(掛念)이 변해 된 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면 전두환(全斗煥)씨는 양정모(梁正模)씨를 괘씸하게 여겼다.梁씨의 설명에 따르면 일해(日海)재단 모금(募金)에 소극적으로 호응한 것이 괘씸의 씨앗이었다.全씨의 괘씸이 응징으로행동화해 국제그룹을 공중분해하자 이 일은 그 이 후로 梁씨의 한이 된다.한 사람이 괘씸을 과도한 응징이나 복수로 풀면 상대방에게는 한이 맺히게 된다.이런 패턴을 괘씸과 한의 복식부기(複式簿記)라고 부르면 어떨까.
全씨의 梁씨에 대한 괘씸죄 처형은 독재자답게 차원이 음험하면서도 쩌렁쩌렁했다.국민에게는 「보라! 나는 재벌 따위에 기대 동거하는 시시한 대통령이 아니다」는 선언(宣言)이 되기를 꾀했다.다른 재벌에게는 「보라! 이런 꼴을 당하지 않 으려면 얼른얼른 자진해 바쳐라」는 밀지(密旨)가 되도록 연출했다.자신에게는 칼을 마음껏 휘둘러 보았다는 통쾌함을 가져다 주었다.12.
12 쿠데타와 5.18광주학살에 이어 8년동안을 이런 식으로 괘씸죄의 칼을 휘두른 그를 외국 언론은 지금 악한(惡漢) 또는도살자(屠殺者)라고 부른다.
노태우(盧泰愚)씨는 全씨가 휘둘렀던 칼자국을 따라가며 이삭을주웠다.그는 자신이 직접 칼을 휘두르는 대신 全씨의 조수로서 12.12와 5.18을 통해 제작.감독.연기(演技)한 으스스한영상(映像)을 슬쩍 슬쩍 내비치며 생리적으로 괘씸죄에 걸릴까봐무서워 쪽을 못쓰는 갑부(甲富)들의 등을 쳐 먹은 사람이다.이래서 외국 잡지는 그를 추악한 자,또는 좀도둑이라 부른다.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지만 괘씸죄는 법률 책에 쓰인 죄가아니다.괘씸죄는 반민주주의적이고 편협한 교양없는 독재 권력자라면 너무도 쉽사리 엮을 수 있는 표적있는 사감(私感)에 불과하다.대통령이 마음의 밀실에서 괘씸죄 시동(始動) 열쇠를 돌리면공식적인 행정.사법처리 절차가 만인이 보는 큰 길을 달리도록 그렇게 아직도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운영되고 있다는 의혹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사정(司正)과 개혁(改革)이라는 역사적 대장정도 괘씸으로 시동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이 양대(兩大)캠페인의 첫회째 표적이 된 정주영(鄭周永).박태준(朴泰俊).박철언(朴哲彦)제씨에겐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괘씸하게(?)생각할 사연이 있었다.초원복집 사건에서도 엿들은 죄는 처벌받았으나 모의한 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현대그룹에서 은행대출과 투자 허가가 2년 이상막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盧씨 뇌물죄에서도 검찰 출두에 게을렀던 정태수(鄭泰守)씨 만이 구속됐다.괘씸죄는 속성상 불공평할 수밖에 없다.괘씸죄에 일단 걸린 사람은 곧장 법률적.행정적.금융관행적 불이익 처분으로항상 연결되도록 법이 운영되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명제도 실제로는 허언(虛言)일 수밖에 없다.
金대통령이 12.12쿠데타 16주년 기념일을 당해 발표한 담화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었다.『역사를 되돌리려는 파렴치한 언행은 더 이상 국민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묵과할 수 없었다.』 여기서 파렴치한 언행이란 全씨의 지난 2일 자기집 대문앞 성명발표를 지칭하는 것임은 쉽게 알만하다.많은 국민이 全씨의 뉘우침없는 이 시대착오적 성명을 괘씸하게 생각했다.그러나법은 일반적이라야 한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주간 이코노미스트지 이번 호는 한국의 대통령을 「법률 위에」군림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걸리는 놈만 있으면 자꾸 괘씸하게 생각하고 싶고,괘씸죄로써 기존 법률을 시동하는 방아쇠삼아 당기고 싶고,기존 법률이 모자라 면 부정부패를 타파하겠다느니 하는 등의 명목으로 특별법까지 제정하고 싶어지는 유혹을 자제하지 않는 것이 법률 위의 군림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을 누군가가 자칫 괘씸죄로 다스리려 할까봐 걱정되기도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괘심을 거두고 법률 아래로 내려가라.이것만이 민주주의와 안보(安保)안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 다.』 (논설고문) 강위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