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엄상빈과 함께 걷는 길 그리고 삶 ②

중앙일보

입력

카메라로 하여금 말하게 하다

1. 아이들을 깊이 들여다 보다

엄상빈의 작품 중 20년에 걸쳐 만들어진 ‘학교 이야기’라는 사진집이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수작이다. 1980년부터 2000년까지 교사생활을 하면서 엄상빈은 한 번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입시제도라는 우물 속에서 살아가는 제자들과 자신의 처지가 늘 안타까웠고 그래서 교정의 모습을 순수하게 관찰하고 기록해줄 제 3의 눈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엄상빈의 카메라는 훌륭한 눈이 돼주었다.
제3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제자들의 삶은 기성세대나 선생님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으로 가득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느 순간은 때 하나 묻지 않은 순진무구함으로 렌즈 밖 선생님의 시선을 즐겁게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아이들이 얼마나 부실한 시설 속에서 부족한 교육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엄상빈은 줄곧 학생 생활지도를 담당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힘든 자리였지만 더 치열한 작업을 위해 그는 항상 자처해서 그 자리를 떠맡았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내면으로 다가가는 작업은 생각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성장과정은 기승전결의 수순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최대한 많이 찍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순간이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최선을 다해 포착하는 것만이 왕도였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를 분신처럼 여겼다. 조금만 방심하면 훌쩍 커버리는 아이들이었기에 그의 카메라는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동선 위로 자신의 발자국을 겹쳐 만든 사진집 <학교 이야기>.
그 속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학생들의 이미지가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입 밖으로 굳이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 누군가의 어두운 사연,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는 병폐 등의 기록이 뚜렷하게 인화돼 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미화되지 않은 사실을 촬영하고 보듬어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2. 생명의 소리를 기록하다

환경을 걱정하는 그의 행적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는 20년간 8회 이상의 환경사진전을 가졌다. 지난 86년, 인간의 이기적인 문명주의가 반드시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심각하게 고뇌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의 고장인 속초에 개발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난개발 정책으로 인해 숲이 훼손되고 산이 깎여나가자 작가는 눈 밝은 선지자처럼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며 슬픔에 빠졌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환경문제에 크게 눈뜨는 일반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산과 들을 상하게 하는 인위적인 개발주의가 언제고 우리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라는 걱정이 들자 이 모든 것을 기록해둬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리하여 그는 속초, 고성, 양양의 환경 변화를 꾸준히 기록해 ‘생명의 소리’라는 타이틀로 작품집을 냈다. 20년간 기록해온 자료들 중 100여 점의 흑백사진을 엄선해 내놓은 환경 사진집 <생명의 소리>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이런 작업을 해온 것이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서서히 환경을 망치며 걸어온 우리들의 행적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과오를 코앞에 두고 반성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 아니겠는가.
사진 속 풍경은 아찔하다. 개발론자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청초호, 골프장이며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제 모습을 서서히 잃어가는 산, 오염된 물이 흐르는 강, 침출수가 넘치는 쓰레기 매립장 등등 20년간 진행되고 있는 도시의 개발 풍경은 결코 순탄해보이지 않는다. 해년마다 연어 떼가 넘쳐났던 강어귀에 정체모를 오염물이 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추하다 못해 절망스럽다. 사진을 계속 감상하다 보니 마음이 심란하다. 사진 속 상황이 보는 이의 마음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진실한 환경 다큐멘터리는 언제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 작업을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한다. 그 각오가 곧 생명의 소리를 무심히 넘기지 않게 되는 작은 실천이다. 밝은 렌즈를 가진 그가 이타적인 귀까지 갖췄으니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생명들이 앓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계속)

객원기자 설은영 enyoung@joongang.co.kr

더 많은 정보는 …
www.walkholic.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