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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4호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5호 39면

첫새벽 지하철. 빈자리에 듬성듬성 앉은 승객들은 대개 눈을 감고 있다. 어디론가 일터를 향해 이른 걸음을 하는 사람들. 아마도 매일매일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앉고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가장 편히 내려놓을 것이다. 색색 숨소리만이 들리는, 마치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선 듯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 가방에 얹고,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으로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 아주머니들은 정성껏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한 얼굴들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나처럼 부스스하고 찌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무구하고 정결한 첫새벽 지하철의 사람들. 무뚝뚝하고 무표정하고 무심한, 가수(假睡) 상태의 그 얼굴들. 그들은 어디선가 나보다 먼저 타서 어디론가 나보다 먼 곳으로 가고 있다. 내리는 사람은 나 하나, 첫새벽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갈월-숙대입구역 플랫폼에 띄엄띄엄 서 있었다.

일요일 늦은 밤, 동대문역에서 퉁탕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누군가 들어섰다. “왜 카드가 안 되느냔 말이야? 사람을 어떻게 보고!” 술 취한 남자다. 나는 책에서 눈을 들고 그를 슬쩍 살핀다. “카드가 안 된단 말이지!” 그는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민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내가 대한민국 특전사 출신이야!” 내 옆자리가 비어 있다. 불안하다. 자리를 옮기고 싶지만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책에 눈을 박고 있는데 한 자리 건너 앉아 있던 이가 일어선다. 이럴 수가, 배신자! 진정하자. 저 사람이 그래도 대한민국 특전사 출신인데, 아무려면.

특전사 출신이 비틀비틀 걸어와 과연 내 옆자리에 앉는다, 싶었는데 곧장 벌떡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가 선다. 그가 다시 “내가 대한민국 특전사 출신이야!” 고함을 지르자 “시끄럽다! 조용히 해!” 그 앞에 앉은 남자가 맞고함을 친다. 특전사 출신이 잘 걸렸다는 듯 “당신 몇 살이야? 몇 살인데 반말이야? ‘민증’ 까!” 청하자 “나, 58년 개띠다.” 응하는 목소리가 늙수그레하다. 책에서 눈을 들어 그를 보니 목소리만큼이나 늙수그레한 모습이다. 내 동갑인데…착잡하다. 특전사 출신은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비틀비틀 멀리까지도 걸어가 버린다. 더 어린 모양이다. “나 58년 개띠야! 붙어 보자고!” 이번엔 58년 개띠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제 보니 그 역시 술에 취해 있다. “내가 58년 개띠라니까 피하는구나!” 그 왼쪽 옆 아주머니가 면박을 준다. “아저씨, 시끄러워요. 좀 조용히 하세요.” 58년 개띠는 외양만큼이나 유순한 목소리로 “아, 나이도 어린 사람이…” 어쩌고 하면서 변명한다. “내가 마흔여덟인데!” 그 오른쪽 남자도 면박을 준다. “아, 조용히 좀 해요! 58년 개띠인데 어떻게 마흔여덟이오!?” 세 살 더 부른 남자는 기가 죽어 조용해진다.

지하철은 부드럽게 달리고, 서고, 문이 열리고,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고. 지하철 리듬에 몸을 싣고 책을 읽는 즐거움이여. 내릴 채비를 하며 허겁지겁 읽어 치우는, 책장을 덮기 직전 페이지의 달콤함이여.

“유월이 오면 나는 온종일/ 내 사랑과 함께 향긋한 건초 속에 앉아 있으리/ 그리고 산들바람 부는 하늘에 흰구름이 피어놓은/ 눈부신 궁전을 높이 바라보리.// 그이는 노래 부르고 나는 노래를 지어주고/ 그리고 온종일 아름다운 시를 읽으리./ 남몰래 우리 건초집 속에 누워서도/오, 삶은 즐거워라, 유월이 오면.”(로버트 브리지스의 ‘유월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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