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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왜 문화도시가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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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도시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은 14세기 때 결정된 `한양 천도`라는 역사적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다.

고려시대 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의 출발을 공간 지리적으로 확정한 장소가 바로 지금의 서울이다. 즉 한 나라가 오랫동안 신봉하던 국교를 교체하고 정치권력은 물론 일상적 삶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려는 이념 아래 수도가 바뀐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 출범과 함께 논의되고 있는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과연 행정수도 이전의 당위성으로 거론되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방분권만이 이 시대가 직면한 유일한 과제인지 반문해 보는 일이다.

지난 30여년간 개발 위주 도시정책의 폐해에서 교훈을 얻어 상대적으로 약화돼 있는 도시환경의 자연적.역사적.지역적 특성과 가치를 창조할 수만 있다면 행정수도 이전을 우리는 적극 수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신행정수도 건설은 해방 이후 한번도 정립해 보지 않은 공간적인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며, 그 결과에 따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국가적 사업은 한반도라는 지리적 특수성 위에 21세기의 도시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제시할 수도 있는 전범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전면에 내세워야 할 새로운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화다. 문화도시다. `문화`라 하면, 지금까지는 어느 작가가 말했듯 너무나 가난해서 가족잔치에 초대할까 말까 망설이다 마지막으로 하는 수 없이 초대하는 먼 친척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는 신행정수도 건설에 제일 먼저 초대해야 할 가장 가까운 친척이어야 한다.

문화도시란 기본이 바로 선 도시이며,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도시이고, 공공성이 확장되고 보장될 뿐만 아니라 삶이 문화가 되는 도시로서, 문화도시를 위한 접근과 그 과정마저 문화적일 것을 요청하는 도시다. 행정수도 건설은 단순히 정부 종합청사와 입법부나 사법부 건물들과 같은 정치권력과 관료주의의 공간적 당위성을 획득하는 배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포함해 현재 우리들 도시 내에 심화돼 있는 `상식` 밖의 일들, 즉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이며 반(反)생태적인 공간관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권력과 지배의 공간관에서 시민의 공간관으로, 경제 제일주의 공간관에서 문화적 공간관으로, 인공적인 것으로부터 생태적인 공간관으로의 전환이 바탕이 된 도시를 기본이 바로 선 도시라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시민들이 쾌적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초가 바로 선 도시란 구조적 측면에서 적정하며, 기능적 측면에서 원활하게 작동되고,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를 뜻한다.

이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면적` `평당 가격`과 `소유`가 아니라 `공간`과 `또 다른 가치`와 `향유`의 도시가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지를 체험하게 하는 일이 절실히 요청되며, 만일 이렇게 삶의 의미나 가치까지 총체적 전환점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아무리 정치적 논리로부터 출발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시민이 주체가 되고 그들의 삶이 중심을 이룰 수 있는 문화도시 만들기를 행정수도 건설의 한 목표로 세우고, 진행과정의 필수적인 순서로 정할 수만 있다면 행정수도 이전에 희망을 걸 수도 있다.

한양 천도에 관여한 무학대사나 조정의 대신들은 카메라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으며 통계학도 도시계획전문대학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계획한 도읍 서울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에 유례가 없는 `명당`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만일 지금이라도 우리가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여유와 의지만 있다면 우리도 후손에게 넘겨줄 이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담아낼 `그릇`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정기용 건축가.문화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