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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스파이" 어니스트 볼크먼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939년9월9일 오후 노르웨이 오슬로의 영국 대사관 정문.
한 청년이 찾아와 서류뭉치를 전달하고 황급히 사라진다.독일인 폴 로사보드가 보낸 나치의 무기개발에 관한 개요가 담긴 문서의하나다.이를 토대로 연합군은 히틀러의 공격을 미 리 파악,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한다.전쟁은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반면 지금 로사보드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역사의 전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그러나 그의정보로 연합군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미리 막을수 있었다.그가 없었다면 2차대전 판세도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조국의 극비사항을 적군에 넘겨준 그의 속사정은 무엇이었을까.
로사보드는 촉망받는 독일의 젊은 과학자.1930년대 세계과학계를 주도했던 독일의 학문성과를 소개하는 잡지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었다.반면 그를 포함한 독일 과학계는 히틀러의 집권 이후큰 시련을 맞게 된다.과학도 나치의 이념에 봉사 해야만 했던 것.심지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조차 「유대인 학문」이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았다.
나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이후 영국 정보기관 MI6과 접촉하면서 독일의 첨단무기 상황을 독일의 노르웨이 유학생들을 통해 영국에 넘긴다.특히 히틀러가 야심적으로 추진한 장거리 로켓의 생산예정지를 알려 연합군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게 한다.
조국을 배신한다는 점에서 마음은 무거웠지만 나치의 노선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탐정소설에나 나오는 무용담일 듯 싶다.그러나 실제로 역사에 존재했던 사건으로 최근 미국에서 발간된 『스파이』(원제 Espionage,John Wiley & Sons刊)에 나오는 이야기다.저자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스파이(원제 S pies: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극비정보(원제 SecretIntelligence)』등으로 첩보분야 권위자의 한명으로 인정받는 어니스트 볼크먼.
『스파이』에 소개된 일화는 모두 28가지.볼셰비키 혁명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감시.조종했던 레닌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90년대초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까지 20세기에 발생한 사건들을 정리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다.
「위대한 사기」「내부의 적」「대재앙」등의 소주제별로 관련된 에피소드를 모았다.20세기를 수놓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향방을갈라놓았던 정보원.첩보원들의 활동과 고뇌등이 숨가쁘게 이어진다. 특히 각국 정부의 비밀문서.관계자들의 증언등에 바탕을 두고이야기를 전개,추리소설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스파이들의 피말리는 세계를 수사적 과장없이 전달,역사의 감춰진 실상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한다.
예컨대▶매수한 옛소련의 고위관계자를 통해 20년이상 크렘린의정보를 빼내고 소련과 중국의 알력을 이용,중국과 수교한 미국 CIA의 활약▶2차대전 말기 난공불락이라고 생각됐던 독일의 암호체계를 보란듯이 허물어뜨린 영국 수학자의 비극 적 일생▶세계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던 미국 CIA가 쿠바의 이중첩자들에게 26년동안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일화 등 현실정치의 뒤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첩보전의 진상을 스릴있게 그려낸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흥미서적이 아니다.저자 볼크먼이 첩보혹은 정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역사의 또다른 얼굴을 진지하게 성찰토록 요구하는 까닭이다.
***추악하게만 볼 수 없어 그는 우선 스파이들의 활동,즉 정탐이 음지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말한다.이 때문에정보활동에는 항상 더러운 이름들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스파이들을 이런 눈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웬만한 정보기관을 안둔 나라가 없는 만큼 스파이에 대한 이해도보다 적극적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스파이 연구를 역사의 「공백지대」(Missing Dimension)를 되찾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위대한 정치가와 같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지만 스파이들이그 누구 못지않게 역사의 흐름을 뒤집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학자들도 이들에 대한 관심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특히 그는 정보활동도 인간의 인식에 달린 문제라고 지적한다.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판단력.이에 대한 증거로 지난 79년 호메이니를 경계하기 위해 후세인에게 첨단기술을 전수했던 미국이 2년 뒤 걸프전 때 오히려 이 때문에 애먹었던 사실을 든다.잘못된 선택은 결국 자기에게 피해로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첩보전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상대방을 영원히제압하는 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을 이 책은 다시한번 확인하게 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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