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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처만 바랍니다”는 옛말…피고인 위해 발로 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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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22면

2001년 개봉한 영화 ‘인디언 썸머’의 한 장면. 남편 살해 혐의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신영(이미연 분)의 항소심 국선 변호사로 선임된 변호사 서준하(박신양 분)는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 선고를 이끌어 냈다. 중앙포토

피고인: “판사님, 변호사를 바꿔 주십시오.”
판사: “어째서요?”
피고인: “국선 변호사가 제 사건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판사: (국선 변호사에게) “피고인의 요구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까?”
국선 변호사: “죄송합니다. 피고인이 방금 뭐라고 했는데요?”

국선 전담변호사制 시행 2년, 뭐가 달라졌나

성의 없는 태도로 재판에 임하는 일부 국선 변호사를 풍자하는 우스갯소리다. 실제 몇 년 전만 해도 상당수 국선 변호사의 법정 변론은 “재판부의 선처를 바란다”는 한마디에 그치기 일쑤였다. 대법원이 2006년 3월 전국 18개 모든 지방법원에 국선 전담변호사를 선발해 ‘질 높은 변호 서비스’ 제공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과연 지난 2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난해 9월 서울 종로2가에서 20대 초반의 대학생 2명이 특수절도 혐의로 체포됐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40대 남자의 지갑을 훔쳤다는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이들을 체포한 경찰관은 “지갑을 빼내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대학생들은 처음에는 시인했으나 기소 직후 범행을 강하게 부인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지방 출신인 이들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했다.

이 사건을 맡은 이는 서울중앙지법에서 국선 전담변호사로 활동 중인 심훈종(72) 변호사. 심 변호사는 “대학생들을 여러 번 면담한 끝에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관의 목격자 진술이 있는 터라 기소 내용을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

심 변호사는 현장조사부터 했다. 그 결과 어두운 밤에 불빛도 없는 상황에서 20m 떨어진 경찰차에 탄 경찰관이 범행 과정을 똑똑히 보았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약하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휴대전화 통화 내역 조회를 통해 이들이 몇 달 전 길에서 주운 지갑을 주워 112에 신고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4단독 안성준 판사는 지난 2월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심 변호사가 2006년 국선 전담 법무법인인 ‘프로보노(라틴어로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를 연 뒤 지금까지 무죄를 받아낸 사건(선고유예 포함)은 23건에 이른다.

사형수가 감사편지 보내기도

지난해 10월에는 한 사형수의 국선 변호를 맡기도 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사형수 A씨는 수감 중 교도관을 때린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징역형을 더 선고받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며 재판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심 변호사는 면담을 통해 “희망을 버리지 말고 모범적으로 수형 생활을 하다 보면 감형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며 A씨를 설득했다. 검찰이 징역 2년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심 변호사의 적극적인 변호에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A씨는 선고 후 보낸 편지에서 “못난 흉악범의 인권을 대변해 주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며 고마워했다.

심 변호사 같은 국선 전담변호사는 법원에서 배정하는 국선 사건만 담당한다. 고객 사건을 처리하다 가끔씩 국선 변호를 맡게 되는 일반 국선 변호사에 비해 더 큰 열의를 갖게 된다. 국선 전담변호사는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의 피고인이 경제형편이 어려워 사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을 때 청구한다. 형량이 3년 이하이더라도 변호사 선임 능력이 없을 경우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국선 전담변호사는 서울중앙지법 19명을 포함해 모두 76명. 2004년 시범 실시 때 20명이었던 변호사 수가 시행 4년 만에 네 배 가까이로 늘었다. 법원행정처 손철우 사법정책실 형사정책심의관은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자질과 능력 면에서 사선 변호사에게 떨어지지 않는다”면서 “앞으로 수를 더 늘려 나갈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국선 변호사는 무성의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국선 전담변호사를 보면 꼼꼼히 공판 준비를 해온다”고 말했다.

수임 건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에 지난해 접수된 형사사건 1만9824건 중 국선 전담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3139건(15.8%)이었다. 2005년 1만8273건 중 국선 전담변호사가 처리한 사건이 1210건(6.6%)이었던 것에 비하면 두 배 이상 늘었다.

무죄율은 사선 변호사의 1/3 수준

변호사 수가 지난달로 1만 명을 넘어서면서 국선 전담변호사 지원자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 국선 전담변호사는 “변호사 개업을 해도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월급이 보장되는 국선 전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선 전담변호사들은 2년 계약을 하고 1인당 월평균 25건의 국선 사건을 맡는다.

시행 초기 월 30~40건의 사건을 처리해 왔지만 충실한 변론을 위해 최근 수임 건수를 대폭 줄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선 변호사에 비해 사건 수임은 많은 편이다. 과도한 사건 수임이 변론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국선 전담변호사가 무죄를 받아내는 비율이 매년 조금씩 높아지고는 있지만 사선 변호사의 3분의 1 수준이다. 국회 법사위 김명주 의원은 지난해 대법원 국정감사 때 “국선 전담 변호사가 신뢰를 받기 위해선 지속적 인력 충원으로 수임 건수를 줄이는 등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월급으로 받는 돈은 800만원(세전 기준). 형사사건 수임료가 적어도 300만~500만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건당 수임료가 30만원이 조금 넘는 이들의 수입은 많은 편이 아니다.

반면 업무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숨가쁘게 돌아간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법정에서 변론해야 한다. 재판이 없는 월요일에는 변호사 사무실이나 구치소에서 피고인들을 면담하거나 사건 기록을 검토한다. 이영미(32·여) 변호사는 2006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서울중앙지법 국선 전담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원하던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국선 전담을 선택했다”며 “고되긴 하지만 보람을 만끽할 수 있다”고 했다.

국선 전담변호사들이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사무실 문제다. 법원 내에 별도의 공간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 사무실을 마련해야 하는데 월급으로는 비싼 건물 임대료를 감당하기가 버겁다. 대법원 배현태 홍보심의관은 “국선 전담변호사들의 사무실 임대비용을 지원하는 법원 규정이 만들어져 올 하반기부터 시행된다”고 말했다.
서울대 조국(형법학) 교수는 “인권보호 차원에서 수사 단계부터 변호인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국선 전담제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병역 미필자가 일정 기간 국선 전담으로 일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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