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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증하는‘실버 운전’ 안전대책 빨간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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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08면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70대의 주인공 미스 데이지는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 뒤에야 운전사를 둔다.

#1 1960년대부터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해 온 이형기(75·강원도 철원)씨는 지난해 9월에야 버스 운전대를 놓았다. 이씨는 “항상 마음을 다스리고 건강관리를 해 왔기 때문에 얼마든지 더 일할 자신은 있었다”며 “하지만 요즘엔 버스 운전을 하겠다는 젊은 사람들도 많아 눈치가 보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요즘 서울이나 4㎞가량 떨어진 시장에 갈 때 버스에 비하면 장난감처럼 느껴지는 승용차를 운전하고 다닌다.

#2 지난달 말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정영철(68·가명·인천시 남구)씨는 교차로에 진입하기 전 노란색 신호등을 보고 당황했다. 브레이크를 미처 밟지 못하고 교차로로 들어섰을 때 신호등은 빨간색이 됐고, 오른편에서 달려온 차량은 정씨의 차 조수석을 들이받았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정씨는 이후 운전하기가 두렵다.

자동차 보급이 일반화되고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65세가 넘어서도 운전하는 이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운전면허 소지자는 2004년 61만여 명에서 2007년엔 95만여 명으로 56% 늘었다. 이 중 상당수는 ‘장롱 면허’일 가능성이 높지만 65세 이후 면허를 새로 따거나 재발급받은 경우도 같은 기간 38%나 증가했다.
택시 운전자의 고령화 현상은 더욱 심하다. 서울의 경우 택시 10대 중 한 대는 운전자가 65세 이상이다. 3년 전에 비해 고령 운전자는 1.7배에 이른다. 택시 회사들이 젊은 운전자를 새로 고용하기보다 정년을 넘긴 경험 많은 운전자들과 재계약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일반 직장에서 퇴직한 뒤 개인택시 운전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제는 고령 운전자와 관련된 교통사고도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연간 발생한 교통사고 건수는 2003년 24만여 건에서 2007년 21만1000여 건으로 줄어든 반면, 65세 이상 노인 운전자가 사고 책임이 큰 ‘제1당사자’인 경우는 2003년 4562건에서 2007년 8300여 건으로 크게 늘었다. 2004년엔 한 전직 장관(당시 69세)이 자택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다 뒤에서 후진을 돕던 부인을 치어 사망케 한 사고도 있었다.

고령 운전자들의 안전 문제는 선진국에선 이미 오래된 사회적 이슈다. 직접 운전하지 않으면 생필품을 사러 가기조차 힘든 미국에선 고령 운전자들의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에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선 차를 몰던 73세 노인이 길을 잃고 활주로까지 진입, 활주로가 일시 폐쇄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2003년에는 캘리포니아주에서 86세의 노인이 운전하던 차가 농산물직판장으로 돌진, 10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한 사고도 있었다. 2005년에 발생한 치명적 교통사고 중 11%가 고령 운전자와 관련돼 있었다.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안전정책연구실의 이원영 수석연구원은 “고령 운전자 사고는 교차로에서 많이 일어나고 사고 시 치사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은 편”이라며 “노화로 인해 신호나 교통표지에 대한 반응 속도와 순발력이 떨어지는 게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 수석연구원은 “선진국들은 이미 대책을 세우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아직 공식적인 논의조차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이 운전하는 차량에 실버마크를 부착하도록 하는 캠페인 정도가 안전대책의 전부다.
 
미국은 보험료 할인 혜택

미국에선 55세 이상의 운전자들이 안전교육을 받으면 보험료 할인 혜택을 준다. 또 노인 인구가 많은 애리조나주나 캘리포니아주에선 70세 이상의 운전자는 면허 갱신을 할 때 우편으로 할 수 없고 주 교통국에 가야 한다. 이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측과 ‘노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반발하는 노인단체와 논쟁이 뜨겁다.

일본은 고령 운전자들의 대중교통 이용을 유도하고 있다. 고령자와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쉽도록 지원하는 법률을 2000년 제정한 데 이어 지자체별로 ‘면허증 자진 반납운동’을 벌이고 있다.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노인들에겐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면 집까지 무료로 배달해 준다든지, 피자나 음식점 할인 혜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영국 등은 도로 구조나 교통표지판을 노인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개선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 수석연구원은 “같은 노인이라 해도 신체 기능이나 운전 경력의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고령 운전자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며 “고령 운전자는 면허를 갱신할 때 특별한 안전교육을 실시하거나 일정 연령 이상에 대해선 기존의 적성검사 기간을 단축하는 등의 대책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2종 면허의 경우 9년마다 적성검사 없이 갱신만 하면 되고, 1종은 7년(65세 이상은 5년)마다 적성검사를 받도록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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