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허무하지만 그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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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워터게이트사건 당시 CBS방송의 백악관지국장 댄 래더는 「닉슨 죽이기」에 앞장선 스타기자였다.그때의 닉슨에게 도살장과도 같은 기자회견에서 래더는 언제나 닉슨을 손가락질하면서 『미합중국 대통령직(Presidency)에 대해서는 충분 히 존경하는마음을 갖고』라는 말을 앞세우고 가시돋친 질문을 하곤 했다.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미국의 대통령직은 영원한 것이고 존중의대상이지만 닉슨 당신은 존경받을 인물이 못된다는 준엄한 심판이었다.유신독재 아래 있는 나라에서 온 기자에게 그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일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잇따라 두사람의 전직대통령이 재임중에 저지른 과오로 인해 인간적으로 몰락의 수렁으로 빠져들면서 존중되고 지켜져야 할 「대통령직」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에 깊은 상처를 내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대통령직에 그치지 않고 정치체제 의 지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당연히 정치적인 모든 것과 권력에 대한 냉소가 팽배하다.
이 사건이 시간을 끌다가 적당한 수준에서 정치적으로 해결되는게 아닌가 하는 수사 자체에 대한 불신과 경계도 매섭다.그러나노태우(盧泰愚)씨와 그의 율사출신 측근들이 어떤 「여우의 교지(狡智)」를 짜내도 그가 뿌린대로 거두는 사태 를 모면하지는 못할 것이다.국민감정이 사태의 추이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사건이 갖는 상징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6공의 권력형부정이 문민정부가 추진한 개혁의 덫에 걸려 폭로되고 단죄되고 있는 것이다.노태우 비리는 30년에 걸친 군사독재와 플루토크라시(金權政治)의 부끄러운 과거를 마침내 청산하는 한국사회의 자정(自淨)과정(self-healing process)이상도,그 이하도 아니다.노태우 비리의 폭로와 단죄는 87년6월에 일어난 민중항쟁의 최종결실이라 할 수도 있다.6공에 의한 5공청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
노태우 사건을 우리 사회가 정상으로 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우리는 너무 자기비하와 허무.냉소주의에 빠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한 젊은 국회의원의 집요한 추적으로 사건은 폭로되었고 배신감에 전율하는 국민감정이 정부.검찰의 등을 떠밀어 전직 국가원수가 초라한 모습으로 검찰에 출두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그러나우리는 댄 래더기자가 닉슨 개인을 추궁하면서도「대통령직」에 대한 존경을 잊지 않은 정치감각을 교훈삼아야 겠다.여기서 대통령직이라 함은 넓은 의미의 정치.사회체제를 말한다 .철저한 수사와 응분의 처벌은 당연한 요구다.다만 국민감정의 타깃은 분명해야 한다.
盧씨가 저지른 부정과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말대로 성역없는 수사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부정을 가능케 한 제도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 참에 누구도 죽고 누구도 죽여 정치권이 공중분해되는 데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정서적으로 냉소주의와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고 존 로크류(類)의 자유주의 정치이론이 가르친대로정치적인 것의 극소화와 권력의 논리를 최대한 시민도덕화하자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盧씨가 「권력은 악(惡) 」이라는 정서를 자극해 놓은 것이다.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서 정치윤리는 확실히 뿌리를 내려야 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도 완전히 끊어야 한다.청렴함에서 한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도 나오고 호치민(胡志明)도 나와야 한다.그러나 도덕과잉은,그것이 막스 베버가 개 탄한 「역겨운 도덕화(ekelhafte Moralisierung)」까지 가지는 않는다 해도 사회발전에 필요한 정치와 도덕간의 내적 긴장관계(緊張關係)의 균형을 깰지도 모른다.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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