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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그 여자, 그 남자의 同床異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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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경씨는 "사랑도 결국 환상이다. 환상은 지나치면 문제가 되지만 그것 없는 삶은 비참해진다"고 말했다. [권혁재 기자]

남녀간 사랑의 서사는 작가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도전 대상이 아닐 듯하다. 멀게는 오해와 우연, 열정이 뒤엉켜 처절한 파국을 맞는 '로미와 줄리엣'으로부터 가깝게는 불행한 시대적 압력 속에 젊음을 소진한 연인을 다룬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 이르기까지. 숱한 작가들이 펼쳐보인 사랑 서사의 수많은 변주와 조합은 더이상 이야기할 만한 것들을 별로 남겨두지 않은 것 같다.

소설가 김형경(44)씨는 이시대 여성들의 성 정체성의 현주소를 따져 본 이전 작품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 이어 신작 장편소설 '성에'에서도 남녀의 사랑과 성을 다뤘다.

소설의 두 주인공 세중과 연희는 서로에게 '사람들의 무리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처음 만났어도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으로 설정된다.

연희가 생애 최초로 용기를 내 직장 후배이지만 동갑내기인 세중에게 편지를 보내자 세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점심식사를 제안하고, 반주를 겸한 두 사람의 '위험한 식사'는 역시 세중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의해 충동적인 사랑의 도피행각으로 이어진다. 각각 남자친구와 약혼자가 있는 두 사람은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다.

익숙한 소재에 어딘지 결말이 뻔한 멜로 드라마처럼 보이는 출발. 그러나 소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살비듬같은 눈발이 휘날리는 대관령을 넘어 도착한 동해의 한 해변에서 연희는 바로 옆에 주차돼 있는 자동차 속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알고보니 차 속의 남녀는 심상치 않은 일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타자인 연희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을 치른 옆 차의 사내는 동시에 두 여자와 섹스를 나눈 셈이다. 이번엔 연희의 순서. 연희는 옆 차 사내의 시선을 의식하며 세중과 키스한다. 두 남자와 동시에 입술을 나눈 것이다.

'깊은 산속의 어떤 주검''정신의 근간을 흔들고 지나간 사건' 등 소설의 진행 방향을 예고하는 표지들도 매혹과 도취, 갈등과 결별이 부각되는 멜로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짧은 일탈을 마무리 짓고 두 사람이 서울로 돌아오는 길, 눈은 어느새 폭설로 바뀌어 있다. 바닷가에서의 키스 후 신경계의 이상 항진, 비정상적인 각성 상태에 빠진 두 사람은 폭설을 헤치고 설경 속으로 빠져들다 휴게소로 돌아오는 길을 잃고 산속에 고립되고 만다. 불과 며칠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지만 텅 비어있는 집을 찾아 들어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살해당한 남자의 주검이다.

알고보니 사체는 한 구가 아니다. 매일 한 구씩, 연희와 세중은 빈 집에 고립된 지 삼일째까지 두 구의 남자 사체와 한 구의 여자 사체를 발견한다. 설상가상으로 연희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려 두 사람은 빈 집을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위압적인 폭설 속에 갇힌 신체 건장한 젊은 남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주검을 마주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쫓겨 필사적으로 섹스에 매달리는 두 사람의 성애(性愛)는 서로에 대한 애착과 친밀감을 확인하는 단계를 거쳐 상대의 몸을 탐사하는 단계로 나가고 최종적으로는 사디즘적, 마조히즘적 도착의 양상에까지 이른다.

섹스 중인 남자의 머리속을 지배하는 것은 그동안 보아온 포르노그래피의 장면들,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은 경험담, 다른 여성과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에로스에 대한 환상이다. 반면 여자는 보다 완전하고 총체적이며 전인적인 사랑을 꿈꾼다.

결국 김씨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대답은 마지막 장인 '빛나고 충만하며 서러운 것들'에 친절하게 나와있다.

무엇보다 포르노 잡지를 보고 자란 소년이 음란한 아저씨가 되고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자란 소녀가 멜로 드라마에 울고 웃는 아줌마가 되는 현실이 문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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