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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며생각하며>50.끝 이발봉사 신영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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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발사 신영철(申永哲.47.전남무안 태생)씨를 이 시리즈 마지막회 주인공으로 만나게 된 것은 노사연의『만남』노래 마따나 우연이 아니다.영어 속담에 「가장 좋은 것은 마지막까지 남겨둬라(Save the best to the last !)」라는 말도 있으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상인(正常人)」은 어떤 사람일까.사람 사는 최대의 가치를 돈과 여가에만 두고 이 두가지를 최대로획득해 자기만 오붓이 사용하려는 사람이 아닐까.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 시대의 「괴짜」일 것이다.
신영철씨는 괴짜다.스물두살 때부터 시작해 지난 스물 다섯해 동안 이 사람은 자신의 휴일을 고스란히 돈 없는 불쌍한 노인과고아들에게 공짜 이발을 베풀면서 그들과 말동무,마음동무가 되어주는 데 모두 바치고 있다.그를 「탑골공원의 이발사」라 부를까,아니면 「고아원의 이발사」라 부를까.일단 신영철씨의 이야기부터 듣자.
『열 여섯 살에 고향 전남 무안 현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아무말 않고 집을 뛰쳐 나왔죠.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집을 「뛰쳐 나왔다」는 대목에서 이 사람은 30년이나 지난 일을이야기하면서도 딴은 용수철처럼 잠시 움츠리는 듯 보였다.말은 적지만 기쁨은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 그도 이 말을 할 때는 그두려웠을 결단을 내리던 당시의 기억 속에 감금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그가 말을 계속한다.
『저는 9남매 가운데 둘쨉니다.우리 집은 소작 몇 마지기 부치고 사는 농민이었고요.이발소 들어가면 괜찮다는 얘기를 시골서들었어요.서울에 도착해서 무작정 눈에 띄는 이발소에 가 일 좀하자고 그랬어요.그 때는 먹여만 주면 되던 때 였지요.그게 약수동에 있는「경복이발관」이라는 데였습니다.
꼭 (이발)기술자가 되어 보겠다고 마음 먹고는 죽기 살기로 나섰습니다.그렇게 하다가 열아홉살 때 이문동에다 조그만 셋가게를 하나 얻어 분가했습니다.동생들을 하나 둘씩 불러 올렸습니다.시골서는 먹을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그 때는 서울만 올라 오면 먹고 살게 되는 줄 알았지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언제부터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느냐고물었더니 그가 대답한다.
『그 때는 자원봉사라는 말은 알지 못했고요.70년인데,제가 어렸을때 겪은 고생을 생각해서 고생하는 사람을 위해 뭐 하나 해보자,그러나 가진 것이 없으니 몸으로 때워야 겠다,이런 생각으로 고아원을 찾아갔습니다.저 자신이 고아 아닌 고아로 어린시절을 보내지 않았습니까.언제나 배가 고팠고 점심은 아예 못먹는것으로 되어 있었고 아무도 밥 한그릇 먹으라고 주는 사람 없었으니 서러웠고,그래서 먼저 고아원 생각이 났던 겁니다.
이 애들 이발이라도 해주자,어려운 사람들을 내가 할 수 있는일로 거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그 시절 애들은 머리도 길었지만무엇보다 부스럼 투성이에 이가 득실댔습니다.머리 깎는 것보다 이 잡아주는데 시간이 더 걸렸어요.이문동에 있 는 경희고아원이라는 곳이었어요.그 때는 목요일이 제가 쉬는 날이었어요.매주 목요일 가서 애들 이발을 해주었지요.』 그후 25년동안 1주일에 하루 있는 이발소 휴일이면 그는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고아.장애인.가난한 노인.소년 가장들에게 무료 이발 봉사를 해 오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희고아원(수용 고아 60명) 한 군데만 나가다가77년부터 용산에 있는 영락보린원(수용 고아 120명)에도 나가게 되었어요.경희고아원은 그 후 없어졌어요.85년부터는 용산에 있는 세심원(수용 고아 60명)에도 나가고 87년부터는 소년가장들 돕기에도 끼어들었지요.
88년부터는 탑골 공원에도 나갑니다.경기도광주에 있는 한사랑마을(정신장애인 시설)과 서울의 신당동노인정에도 나가게 되었어요.이번 일요일에 여기 가면 다음 일요일은 저기 가고 해요.하루에 두 군데 가는 날도 있고,그렇게 지금까지 하 고 있어요.
』 그는 이발소를 자영하다 실패하고는 월급쟁이 이발사가 됐다가,다시 자영했다 하기를 몇차례 거듭했다.월급쟁이로 들어갈 때는1주일에 하루는 쉰다는 조건을 반드시 받아냈다.자영할 때는 스스로 정해서 그렇게 지켰다.그에게 휴일은 혼자 별 도로 작정한무료 노동을 하는 날이었다.
***대구여자와 연애결혼 결혼은 언제 했느냐고 물으니 스물세살에 했다고 한다.연애결혼이었느냐는 질문엔 웃음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는 천성이 눌변인 위에 의식적으로 말을 아낀다).
『집사람은 대구가 고향입니다.두쪽집 다 우리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전라도-경상도 문제 때문이었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말한다.지역이 아니라 인종이 다르더라도 신씨만한 사위를 그리 오래 배척할 처가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요새도 처가에서 전라도 사위라고 멀리 하느냐고 물었다.흠뻑 웃음을 머금고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제 집사람도 시집온지 얼마 안지나,진작부터 온 식구들한테 며느리 잘 봤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결혼할 때 신영철씨는 동생을 벌써 네명이나 서울로 불러 올려 데리고 있었다.이발소 식구까지 합쳐 일곱 여덟명 밥을 해 먹인 신부가 70년대라고 흔했을 리 만무하다.이 부부 사이에는 아들만 둘.큰 아들은25세,대학을 졸업한 뒤 최 근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둘째아들은 현재 의경(義警)으로 복무중이다.
신영철씨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질병에 관한 철학적 처방(處方)을 세워 놓고 있다.그가 지니고 있는 가족 최우선 철학은 구비구비 곡절있는 경험을 거쳐 빚어지고 구워졌을 것이다.
이 25년 동안 고아.장애인.불우노인를 위해 자원봉사 활동을펴 오면서 「나도,내 아이도 이들같은 불쌍한 처지에 언제라도 빠질 수 있다」고 자각했던 거다.그가 말한다.
『옛날에는 부모 없는 고아가 80%였는데 지금은 부모 있는 고아가 80%입니다.부부싸움 잦고,집 나가고,이혼하고.부모가 이런 아이는 처음엔 이모나 삼촌같은 친척한테 맡기지만 결국엔 고아원으로 들어 옵니다.
저는 이발을 해 주는 동안 아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상대합니다.고아원 경영하는 일에는 관련이 없으니 애들도 다른 사람보다 저를 더 허물없이 대하고요.더 정답게 이야기 나누지요.애들각자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도 알게 돼요.그래서 「선도」 역할을해 보려고 저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그러나 고아원 아이들은 「나는 고아다」라는 생각이 머리에 딱박혀 있는 것같아요.그래서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마음을 제대로열지 않습니다.부모가 없으니 그 누구도 (따끔하게)벌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예요.그래서 제 멋대로 하다가 포악해지는 수도 있고.
***남보다 돈복은 없는편 그 애들과 접촉하면서 배우는 것도많습니다.저는 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부모의 책임은무엇보다 가정을 지키는 것이고,아이들은 가정에서 자라야 교육이제대로 됩니다.저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집사람 은 다른 일 안 시키고 애들 돌보고 가정교육하는데 전념케 했습니다.
정신 장애인들 가운데도 부모 무관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 많아요.아이 혼자 놔두고 맞벌이한다고 병이 왔는데도 모르고 있다가 정신 장애인 되게 하는 일 많대요.요즘은 모두 돈만,돈만하는데 아이들은 다 클 때까진 갈등 없는 화목한 가정에서 돌봐주고 꾸중도 하면서 키워야 한다고 봅니다.』 와! 이건 맞벌이시대를 비판하는 확 튀는 짜릿한 반론(反論)이다.
신영철씨는 현재 롯데월드 지하1층에 있는 구내이발소에서 다른직원 없이 혼자서 「커트실」수준의 이발소를 맡아 하고 있다.자기한테는 돈복은 참 없다고 한다.어디서 가게를 해도 그다지 번창하지 않는다고 한다.자그마한 체구에 상냥한 얼 굴,싹싹한 마음씨,비할 바 없는 부지런함,그의 이런 점을 보건대 대개인(對個人)서비스업자로 번창할 조건은 다 갖추었건만,역시 재복(財福)이란 별도의 것인가 보다.
자원봉사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그에게 물었다.그의 겸손함이 또 나온다.
『제가 그런 것을 알 수가 없죠.제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예요.쉬는날 하는 것일 뿐이고.노인과 애들 머리 깎으며 불평.불만.하소연 들어주는 것이 제 일의 전부인걸요.(정신)장애인이발할 동안은 같이 장애인이 되어 줍니다.이발 끝나고 나오면 저는 건강한 사람이 다시 되죠.
***10년전부터 교회 다녀 제가 해보니 이런 일은 마음입니다.사람들 스스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자원봉사 생활을 해야 오래 계속될 것으로 봅니다.사람들은 큰 것만 가지고 봉사하려 해요.같이 하자고 하면 돈 벌어서 이담에 하겠다고 합니다.어떤사람은 면박이나 줍니다.「너도 못 사는 주제에 뭘 남 돕겠다는거냐」 이런식입니다.
처음 제가 고아원 드나들던 때는 사람들 생활이 지금에 비해 무척 어려웠습니다.그래도 찾아 다니며 돕는 사람 무척 많았어요.그런데 지금은 찾아 오는 사람이 아예 없어져버렸다고 할 지경이 되었어요.왜 그럴까하고 우리들끼리도 궁금해 할 때가 많아요』 신영철씨는 10년전부터 기독교도가 되었다.올해,본인 말로는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서울 충현교회 집사가 되었다.일요일엔 가장 이른 예배를 본 다음 자원봉사 일터를 향해 나선다. 자원봉사 이발 일이 밀렸다 싶으면 할 수 없이 교회를 빠지는 일요일도 있다고 한다.이 대담(對談)동안 내내 일일이 묻지않으면 말이 없던 그가 놀랍게도 성경 한 구절을 외워 들려 주겠다고 자청한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 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솔로몬 왕의 잠언(箴言)3장27절에 있는 말이라고 신씨는 나에게 가르쳐 준다.역사가 있은 후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는 솔로몬 왕,그의 이런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알기도 전부터 그것을실천해 오고 있는 신영철씨 또한 그 임금님 못지 않게 현명한 사람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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