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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속 기술 되살려 흑자 전환 꿈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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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34면

“그 물건 얘기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 하지마!”

재기 모색하는 코닥

33년 전인 1975년 미국 뉴욕 로체스터 코닥 본사 회의실. 당시 세계 카메라 필름 시장을 주름잡고 있던 코닥의 경영진은 25세짜리 풋내기 연구원인 스티븐 사순이 들뜬 마음으로 선보인 디지털 카메라에 대해 이렇게 지시했다. 사순은 그후 1년 동안 경영진을 설득했으나 당장 팔아먹기 힘들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

심지어 그는 ‘코닥의 판도라 상자’를 연 반역자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그는“거대한 절벽이 앞에 있는 듯했다”고 당시 심정을 털어놓았다. 코닥은 그때 성공의 관성에 젖어 있었던 셈이다. 일본 후지필름과 함께 세계 필름 시장을 양분하던 상황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일본 소니와 니콘 등이 디지털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에도 코닥 경영진은 정신 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필름과 막 개발한 1회용 카메라를 주력 상품으로 밀었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87년 14만5000명에 달하던 직원 수는 지난해 말 2만69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기간 순이익은 23억 달러 흑자에서 2억5000만 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코닥은 2005년부터 3년 내리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재래식 필름의 마지막 전성기인 2000년 주당 80달러를 넘나들던 주가는 지난 주말 18달러 선을 기록했다. 4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제록스 신드롬

미국 기업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코닥이 제록스 신드롬(증후군)에 빠져 있었다”고 지적했다. 제록스 신드롬이란 자신이 개발한 절묘한 신기술을 활용하지 못하고 남 좋은 일을 시킨 미국 복사기업체인 제록스 경영진의 안목을 비꼬는 말이다.

제록스는 컴퓨터의 기본인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를 최초 개발했다. 하지만 제록스 경영진은 이 기술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했다. 나중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애플을 설립하고 제록스 기술을 바탕으로 매킨토시 컴퓨터와 운영체제(OS)를 개발해 개인용 컴퓨터(PC)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어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도 그 기술을 가져다 윈도 시리즈를 개발해 세계 IT 황제로 등극했다. 제록스는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였던 셈이다.

“코닥의 경영진은 관성에 젖어 90년대 후반까지 제록스 신드롬에 빠져 있었다”고 고든은 말했다. 코닥 영영진은 뒤늦게 정신 차리고 2002년 이후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니콘과 캐논·삼성 등 업체를 따라잡지 못했다. 제록스가 한때 컴퓨터 개발에 나섰으나 실패했던 그 역사를 되풀이한 셈이다.

미 IT 마케팅 전문가인 레지스 매키너는 “원천 기술의 상업화에 실패한 기업은 그 기술에 매달릴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변신을 추구해야 성공한다”고 말했다. 애플이 본업이던 컴퓨터를 주력업종에서 밀어내고 디지털 종합기기 회사로 변신한 것처럼 코닥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레즈 혁명

침몰하던 코닥은 2003년 대대적인 변신에 들어갔다. 우선 컴퓨터 회사인 휼렛패커드 출신의 안토니오 페레즈를 사장으로 영입했다. 그는 이듬해인 2004년 1월 1일 전격적으로 재래식 카메라 생산을 중단했다. 내부 반대 세력이 있었지만 나날이 떨어지는 주가에 분노한 투자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과감하게 돌파했다.

하지만 이 정도 개혁으론 중병이 든 코닥을 되살리기 어려웠다. 코닥이 건강관리업체 등 대형 자회사만 7~8개를 거느리고 있어 그룹 전체를 대대적으로 수술해야 했다.

페레즈는 이런 전면적인 구조조정을 하기에 ‘코닥 사장’이라는 직함으론 충분하지 않음을 절감했다. 그는 “그룹 차원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펀드매니저와 주주들을 설득해 2006년 1월 코닥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휼렛패커드 시절 같이 일했던 인물들을 영입해 경영진 물갈이도 단행했다. 여세를 몰아 최초 개발업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일본업체인 치논 카메라를 인수해 디지털 카메라 생산을 통째로 맡겨버렸다. 니콘 등을 추격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자회사에 사실상 아웃소싱한 셈이다.

그는 또 코닥이 80년대 인수합병(M&A) 바람을 타고 사들였던 건강관리업체인 오넥스 헬스케어 등을 2007년 팔아 치워 실탄(자금)을 마련했다.

혁신의 법칙

페레즈는 회사를 살릴 비책은 회사 가까이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전 경영진이 가치를 간파하지 못해 잠자고 있거나 집중하지 않은 자체 기술에 주목했다. 바로 디지털 사진 인화 용지와 프린팅 장비, 속도와 선명도를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잉크젯 프린터 기술 등이다. 페레즈는 이를 바탕으로 코닥을 필름회사에서 디지털 이미지 프린팅 회사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런 페레즈 개혁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시장은 일단 관망하고 있다. 단 코닥 내부의 기득권과 통념에서 자유로운 존재인 그가 불가능해 보인 코닥의 변신을 밀어붙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05년 이후 적자이던 순이익도 올해는 소폭이나마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월스트리트는 기대하고 있다.

“페레즈의 개혁이 성공하면 코닥은 1888년 설립 이후 120년 만에 질적으로 다른 회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면 미 경영학계는 성공적인 위기 극복 사례로 애플과 함께 코닥을 연구·분석하게 될 것”이라고 존 스틸 고든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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