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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꺼진 밤거리 보며‘기업 말곤 방법 없다’ 절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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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28면

2006년 어느 초여름 밤 군산항 내항을 지나던 문동신(70) 군산시장의 눈에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펼쳐졌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 가로등마저 모두 꺼져 있었다. 1899년 개항한 군산 내항은 인천·부산과 함께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공사라도 합니까.” 문 시장이 물었다. 담당자는 난감해했다. “예산이 없어 꺼뒀습니다.” 문 시장은 눈을 감았다. “가난할 망정 불은 켜고 삽시다.”

‘주식회사 군산’ 이끄는 문동신 군산시장

꼭 2년이 지난 2008년 5월 군산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현대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가 새 공장을 짓고 있고 동양제철화학 등 기존 입주 업체들도 앞다퉈 증설에 나서고 있다. 육지와 오식도·비응도 사이의 바다를 메워 조성한 군장국가산업단지엔 하루가 멀다 하고 새 건물이 들어선다. 땅값은 지난 2월과 3월 전국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고 시청 부근 헬스클럽엔 ‘기업 유치를 위해 애쓰는 주식회사 군산시청이 자랑스럽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비결이 뭘까. 어버이날인 8일 군산시청 4층 시장실에서 만난 문 시장은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10년간 군산에선 사람과 돈이 빠져나가기만 했다. 1990년대 후반 30만 명가량이던 인구는 한 해 2000명씩 줄어 26만 명까지 떨어졌다. 경기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시내 식당이나 상가는 울상을 지었다. 광복 60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식 가옥이 남아있다 보니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가 됐다.

답은 뻔했다. 기업을 유치해야 했다. 시민들에게 설문을 해보니 떠나는 사람의 절반 가까이가 일자리 때문이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문제가 뭘까.’ 문 시장의 고민이 시작됐다. 국가·지방 산업단지에 입주한 200여 개 기업을 일일이 돌며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입주업체들의 협의회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산업용수가 비싸다’ ‘증설 부지 확보가 어렵다’ ‘은행·우체국이 없다’는 하소연이 많았다.

공통점이 있었다. 지자체뿐만 아니라 중앙정부·공기업·이해관계자가 얽힌 ‘복합민원’이란 점이었다. 산업용수는 수자원공사, 증설 부지는 조달청, 우체국은 지식경제부가 각각 관련돼 있는 식이었다. 문 시장은 지자체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인허가 절차 등 시청 내의 프로세스를 간소화하는 정도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기업이 직접 풀기 어려운 일을 대신 맡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7일 착공한 현대중공업 조선소는 이 역할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2006년 말 현대중공업이 새 블록(선박 구성품) 공장 부지를 물색할 때만 해도 군산은 유력 후보가 못 됐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데다 공장이 들어설 만한 땅을 다른 대기업들이 선점해 몇 년째 놀려두고 있었다.

땅을 반환하도록 해당 대기업들을 설득하는 데 몇달이 걸렸다. 현대중공업이 블록 공장을 조선소로 확대하려고 하면서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도크가 들어설 곳이 항만구역이었다. 수심이 깊어 가장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요지인지라 항만노조가 ‘특혜’라며 반대했다. 국토해양부는 “이미 방파제와 도로 등에 투자한 270억원을 날리란 말이냐”며 반대했다. 문 시장과 담당국장, 실무자까지 국토해양부와 씨름을 시작했다. “새만금에 들어설 새 항만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군산시의 끈질긴 요청은 결국 전례가 없던 국토해양부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동양제철화학과 특수강 업체인 세아베스틸의 증설 땐 조달청에 큰 빚을 졌다. 세아베스틸은 2006년 제강 능력을 88만t에서 180만t으로 늘리기로 했지만 항만과 도로에 둘러싸인 입지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공장 옆 조달청 긴급물자 비축기지 터 16만여㎡에 주목한 군산시는 조달청을 설득해 동양제철화학 근처로 옮기게 했다. 1년 뒤 동양제철화학이 태양광 발전용 폴리실리콘 공장 신축을 추진하자 시가 난감해졌다.

회사 측이 요구한 땅이 하필 얼마 전 이전한 비축기지 터였던 것이다. 문 시장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하는 조달청장을 설득해 또다시 이삿짐을 꾸리게 했다. 이 같은 노력은 지난달 청와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이수영 동양제철화학 회장 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이 “전봇대를 이미 뽑아버린 곳이 있다”며 군산을 소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코디네이터 역할엔 조직의 변화가 필수였다. 문 시장은 ‘군산을 포함해 전국 지자체 어디나 열심히 하자고 하는데 잘 안 되는 이유’를 “순환보직 탓”이라고 봤다. 한 자리에 1년 이상 있기 어렵다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피하려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장 취임 첫해를 꼬박 시청 공무원 교육에 쏟으며 열정과 경영 마인드를 불어넣었다. 과장 이상 간부 100여 명이 각자 2개 기업을 맡아 기업 애로를 전담 해결하도록 했다. 고과 가점제와 특진 등 인센티브를 제시해 한 자리에서 전문성을 쌓도록 유도했다. 지난해 현대중공업 유치를 담당한 실무자가 사무관으로 특진했다. 지자체엔 유일한 투자지원과와 인재양성과도 새로 만들었다.

군산시는 기업투자 관련 인허가를 다음날로 넘기지 않고 접수 당일 처리한다. 감사를 두려워해 나서지 않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하다 생긴 실수는 앞장서 덮어줬다. 간부들에겐 “능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람을 바꾸기보다 있는 사람을 키우고 일할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대로 일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라는 게 문 시장의 설명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성과가 눈에 보이면서 시청 공무원들도 재미를 붙였다. 인구는 지난해를 바닥으로 증가세로 돌아섰다. 1만5000여 명이던 공단 유동인구가 4만 명으로 늘면서 시내 식당과 술집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불이 다 꺼지다시피 했던 조촌동 모텔촌엔 요즘 다시 네온사인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 임시 숙소를 찾는 공단 근로자와 출장 온 사람들 덕이다.

기업들 사이에서 군산의 인기도 치솟고 있다. 20%가 안 되던 공단 분양률이 94%를 넘겼다. 땅이 부족해져 얼마 전 “분양받은 터에 공장을 빨리 짓지 않으면 돌려받겠다”는 공문을 205개 기업에 돌렸을 정도다. 공문을 받은 곳 중 157개가 내년까지 착공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최근 분양한 국가공단 내 중소기업부지 22개는 300대1의 경쟁률을 보이며 동이 났다. 그동안 유치한 300여 개 기업이 모두 들어서는 2012년이면 지방세만 2500억원이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아직은 2% 부족하다는 게 문 시장의 생각이다. 유치 못지않게 관리도 중요해서다. 그는 현재 입주업체들의 가장 큰 불만인 산업용수 값에 매달리고 있다. 금강하구언에서 끌어오면서 각종 수질관리 비용과 부담금이 붙다 보니 다른 공단보다 비싼 점이 문제다. “수자원공사 등과 협의해 30%가량 낮추는 게 거의 확정된 단계”라고 한다. 유치 과정에서 대기업에 배울 점도 많이 발견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6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해 돌리는 정확성과 시스템, 현장에 파견된 부장급 간부에게 책임과 권한을 모두 주는 신속한 의사결정 구조 등이다.

문 시장은 “대기업 하나를 유치하면 협력업체는 물론 다양한 기업들이 따라오더라”며 “교육 예산을 두 배로 늘리는 등 입주기업과 주민이 편히 정착할 수 있는 지원시스템을 갖추는 데 힘을 쏟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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