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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토지에 생명을 심고 떠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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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05면

『토지』 독서 양태 짐작해 보니
우스개처럼 말하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토지』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그리고 읽기 시작했으나 끝까지 다 읽지 못한 사람. 아마 ‘토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 ‘다 읽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들에겐 원고지 4만 장 분량에 단행본으로 21권이나 되는 긴 소설을 읽은 사람이 대단해 보일 게다.

『토지』는 한국형 문화 콘텐트 의 박물관

평소에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도 박경리 선생의 의식 불명 소식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돌아가신 뒤 전ㆍ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저명인사들이 문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토지』가 대단한 작품이긴 한 모양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는 “자네는 『삼국지』를 읽어 봤나?” 하는 뉘앙스로 “자네는 『토지』를 읽어 봤나?” 하는 물음이 일상화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삼국지』를 굳이 책으로 읽지 않았더라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해온 것처럼 『토지』에 대해서도 “만화로 읽었어” “드라마로 봤어” “영화로 봤어” “뮤지컬로 봤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토지』의 매체 변용은 매우 다양해 TV 드라마로 3회(1979년 KBS, 87년 KBS, 2004~5년 SBS), 영화로 1회(74년, 김수용 감독, 김지미ㆍ이순재 주연), 뮤지컬로 1회(9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각색되었으며, 『청소년 토지』(2003년, 이룸출판사)에 이어 오세영 작가의 『만화 토지』(2007년, 마로니에북스, 제1부 전 7권)까지 나왔다. 그리고 이런 매체 변용은 앞으로 더욱 다각화될 전망이다.

69년 ‘현대문학’에 『토지』가 처음 연재되기 시작할 무렵 매달 연재를 기다리며 읽던 독자, 73년 1부가 단행본 5권으로 처음 출간되었을 때 용돈을 모아 책을 사 보던 독자, 그리고 방학마다 『토지』를 읽어 아홉 번째 읽는다는 대학생처럼 『토지』가 세대를 초월해 독자를 사로잡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토지』의 엄청난 다성성(多聲性)
『토지』는 전체가 5부로 나뉘며 1897년 음력 8월 15일 한가위부터 45년 양력 8월 15일 광복까지 기나긴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토지』 속 공간은 경남 하동 평사리부터 진주·서울을 거쳐 간도·중국·일본 등지로 확대되며, 그 안에 7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토지』는 작품을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역사소설·가족사소설·연애소설·지식인소설·농민소설 등으로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토지』는 어떤 장르 개념을 가지고도 다 포괄할 수 없는 소설이며, 어쩌면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를 변화시킨 작품’이라는 평가가 가장 설득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토지』에는 어떤 중심이나 주인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며칠 밤을 새워 『토지』를 다 읽고 또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토지』를 끝까지 다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주요 인물로 생각되는 길상이나 서희는 신분 혹은 재력 때문에 시종일관 많은 사람과 관련된다. 하지만 소설 전체를 봤을 때 이들이 나오는 부분은 1, 2부에 집중된다. 소설이 시공간적으로 확대될수록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지극히 세세하다. 일례로 2부 3편에서는 소설 전체를 통해 ‘문 열어 주는 하인’ 역할만 하는 ‘전 서방’이라는 인물의 인생 내력과 기이한 주벽 등을 몇 페이지에 걸쳐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수백 명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
한편 소설에서 결정적 사건이라고 할 만한 3ㆍ1운동이나 별당아씨와 구천의 도주, 서희와 길상의 결혼 등은 사건에 대한 직접적 형상화가 생략된 채 그에 대한 주변 인물의 반응만이 그려진다. 그래서 하인과 결혼한 자존심 센 서희가 첫날밤을 어떻게 보냈을지는 독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사람을 그린다”는 작가의 말처럼 『토지』에는 중심 인물과 주변 인물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장면에 따라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주변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 모두가 자기 삶에선 주인공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주변인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다. 『토지』에서 만나는 온갖 군상, 별 볼일 없지만 아무도 하찮게 취급되지 않는 몇백 명 모두가 우리 인생과 똑같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다. 악인도 늘 악인이 아니고 선인도 늘 선인이 아니며, 모든 인생이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힘겹게 살아간다. 기나긴 소설의 끝이 열려 있다는 점 또한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인생이 매듭지어지지 않고 계속 변모하며 이어지는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특징이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독자층을 소설의 장대한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다.

한국에 대한 모든 걸 담는다
『토지』에는 지주·농민·장사꾼·무당·지식인·도인·친일파·독립운동가·신여성·일본인·중국인·노인·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인물이 여러 시대에 걸쳐 등장한다. 이 때문에 한국의 근현대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름 또한 포착할 수 있으며, 한·중·일 문화와 사상 비교, 한국 각지의 토속 문화는 물론 생생한 팔도 사투리까지 풍부하게 담겨 있어 소설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를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우리 근대사를 생생하게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민중의 구체적인 삶을 고스란히 체감할 수 있다.

1부에서 조준구가 최 참판댁 재산을 가로채 평사리 사람 대부분이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국권 침탈이라는 나라의 운명과 맞물리고, 1920~30년대에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휘말린 우리 민족의 운명이 소설 속에서 광대한 스케일로 형상화된다. 40년대 온 국민이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되고 일제의 폭압 때문에 숨통이 옥죄이던 시기에는 소설 자체의 분위기가 어둡고 무거워 독자의 가슴마저 먹먹해진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한국 근대사를 직접 체험하고 난 듯 기진맥진하고, 한껏 숨죽이다 맞이한 복잡미묘한 광복의 느낌까지 그대로 전해진다. 『토지』에서는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가 굵직하게 거대사로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민중의 일상적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인물들과 함께 한탄과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된다.

생명의 이야기, 풍부한 문화 콘텐트의 바탕
또한 『토지』에는 작가가 집필해 온 69년에서 94년까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작가 특유의 사상과 시선으로 담겨 배어 나온다. 개발독재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팽배해지는 시대를 살면서 작가는 소설에서 ‘사람’과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한다. 작가는 텃밭을 일구며 돌을 고르고 풀을 뽑던 손길로 800만 칸이나 되는 원고지를 메웠던 것이다.

결국 『토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 ‘생명’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변용이 가능하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라도 작품에 대해 밤을 새워 얘기해도 끝이 없을 『토지』의 풍부함은 모든 생명의 소리를 담아내고자 한 작가의 정성스러운 노력에서 나온다.

『토지』의 배경이 되는 하동 평사리에는 ‘토지마을’과 ‘평사리문학관’이 있으며, 작가가 노년기에 거주했던 원주시에는 ‘토지문학공원’과 ‘토지문화관’이 건립됐다. 이외에도 원주시는 ‘토지자료관’ 건립을 추진 중이고, 작가의 고향인 통영 역시 ‘박경리문학관’을 건립 중에 있다.

이처럼 한 편의 문학작품이 다양한 지역 문화 콘텐트 개발로 이어진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다. 과거에 영화나 드라마를 본 사람, 책을 여러 번 읽은 사람, 혹은 읽다 만 사람, 아니면 앞으로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곳을 찾는다. 『토지』는 이들의 숨결이 더해져 그 생명력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작가 조세희는 거대한 중화학공장 몇백 개보다 『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면서 “『토지』가 올려준 것은 우리 정신의 GNP”라고 말하였다. “『토지』에는 다양한 초점 심도가 있다”는 최유찬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작품 가득 울려 나오는 온갖 사람의 생생한 이야기가 앞으로도 다양한 매체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제 『삼국지』를 열 번 읽었다는 사람이 그리 생소하지 않은 것처럼 『토지』를 다섯 번, 열 번째 읽었다는 독자들의 말도 그리 진귀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멀지 않을 것이다.


박경리의 발자취
1926 경남 통영에서 출생. 본명 박금이(朴今伊)
1945 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46 김행도와 결혼. 딸 김영주 출생
1950 남편과 사별
1955 ‘현대문학’에 김동리에 의해 단편 ‘계산’ 추천
1957 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58 첫 장편 『연가』 ‘민주신보’ 연재, 단편 ‘벽지’ ‘암흑시대’ 등 발표
1959 장편 『표류도』발표
1962 장편 『김약국의 딸들』 발표
1963 장편 『파시』 연재
1965 장편 『시장과 전장』 발표, 장편 『녹지대』 연재
1969 ‘토지’ 1부 ‘현대문학’에 연재 시작
1970 단편 ‘밀고자’ 발표, 장편 『창』 연재
1972 제7회 월탄문학상 수상. ‘토지’ 2부 ‘문학사상’에 연재
1973 딸 김영주와 시인 김지하 결혼
1974 장편 『단층』 발표
1977 ‘토지’ 3부 ‘독서생활’, 이어 ‘한국문학’에 연재
1979 박경리 문학전집 전 16권(지식산업사) 간행
1980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
1983 ‘토지’ 4부 ‘정경문화’에 연재
1987 ‘토지’ 4부 ‘월간경향’에 연재
1988 시집 『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 출간
1990 제4회 인촌상 수상.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동광출판사) 간행
1992 9월 1일부터 ‘토지’ 5부 문화일보에 연재
1994 8월 15일 집필 26년 만에 ‘토지’ 탈고
1996 제6회 ‘호암상 예술상’ 수상.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기념 메달’ 받음.
1997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로 임용
1998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 착공
1999 6월 9일 토지문화관 개관
2000 시집 『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 간행
2003 9년 만의 신작 장편 ‘나비야 청산 가자’ 현대문학 4월호에 연재(세 차례 연재 후 중단. 원고지 440장 분량). 4월 문화와 환경전문 계간지 ‘숨소리’ 창간. 7월 청소년용 ‘토지’ 12권으로 완간(이룸). 7월 첫 장편동화 『은하수』 출간(이룸)
2005 11월 팔순 잔치
2007 5월 13년 만의 신작 산문ㆍ소설집 『가설과 망상』 출간
2008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설’ 등 신작 시 3편 발표. 5월 5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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