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惑世誣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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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안방극장의 단골 주인공이라면 광해조의 인목대비,숙종조의 장희빈,고종조의 명성황후 민비를 꼽을 수 있다.조선조 최대의 여걸이라 할 세 여인은 치열한 권력 다툼의 배후 조종자로서 비운의처참한 일생을 마감한 공통점 때문에 시청자들의 눈물과 동정,그리고 비난을 한몸에 받는다.
세 여인에겐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세 여인 모두 지극히 무당을 좋아해 결국 무당 때문에 인생을 망친다는 사실이다.인목대비가 폐모(廢母)의 비운을 맞는 결정적 계기는 「수란개」라는 단골 무당을 동원해 광해군을 저주했기 때문이다.너무 나 잘 알려진 장희빈의 종말도 그녀의 전속 무당 「태자방」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탓이다.
무당을 총애해 전속 무당에게 진령군 칭호를 내리고 국사(國師)급으로 우대해 국사당까지 설치했던 민비는 한판 굿으로 1년치궁중 살림을 거덜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그러나 그녀의 전속 무당은 민비 시해의 어떤 조짐도 예견하지 못 한채 비운의 참살을 겪게 했다.
왜 지금 무당 푸념인가.바야흐로 정보고속도로가 놓이고 최첨단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세상을 바꾸는 시절인데도 우리 사회의깊숙한 곳에서는 아직도 혹세무민의 무당들이 사실상 존경받거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지나치고 있기 때문이다.얼마전 MBC-TV에선 요즘 세간에 나도는 『격암유록(擊庵遺錄)』이라는 예언서의 실상을 파헤치는 보도를 했다.임진왜란을 예언했고 5.16까지 알아맞혔다는 격암유록이란 실은 작자나 근거가 미상이거나 조작돼 한 국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음력 윤8월이다.이달 한달동안 어떤 결혼도 하지않고 이사도 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나돌더니 그토록 예약이 힘들던 예식장과 이삿짐 센터가 일손을 놓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주석이 사망한 날을 예언했다는 예언가.
지관. 무당이 속출하더니 이젠 책까지 내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예언의 내용마저 방송과 신문이 소상히 전달하고 있다.한 무당이쓴『神이 선택한 여자』라는 책에선 『빠르면 올 연말,늦으면 내년 음력5월 내각제가 이뤄지며 초대 총리는 오랜 정치활동 내내부침(浮沈)을 계속해온 천운을 타고난 인물이 된다』고 예언하고있다.그 천운의 인물이 누군지는 독자라면 대개 알만하게 돼 있다.올해 음력 10월중 육지에서 또 한번 대형사고가 나 수많은인명을 빼앗아가고 북한의 김정일(金正日)은 권력투쟁과 건강 때문에 내년중 유럽으로 망명한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정치 예언가란 미국에도,프랑스에도 있으니한번 듣고 흘려버리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우리 사회현실이 어디 그런가.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모두 귀를 모으고 숨죽여 경청하고 있다.김일성 사망일까지 정확하게 맞힌 전 력(前歷)이 있다니 더욱 설득력있게 전파된다.이를 신문과 방송이 부채질해 보도하니 믿어도 좋다는 쪽으로 기울지 않는가.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이들 예언가의 말대로 이미 작정돼 있다면누가 힘들게 일하고 노력할 것인가.불가능한 일도 노력하고 협력해 가능한 일로 만드는게 인간의 일이고, 정치의 세계며,인류의장래가 아닌가.이미 차기 대권은 누구에게 점■ 됐다거나,내각제개헌을 날짜까지 박아 기정사실로 유포하는게 과연 하늘의 뜻이고국민의 선택일 수 있겠는가.
혹세무민이 별게 아니다.특정인과 특정제도까지 거론하며 이를 하늘의 뜻이고 계시라고 주장해 세상을 어지럽히고 국민을 현혹시키는게 바로 혹세무민이다.어디 무당 뿐인가.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변신과 거짓을 거듭하며 정권을 잡겠다는 정치 가의 언행도무당과 다를 바 없이 국민을 현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혹세무민이다.
이들 무당과 교언영색의 정치가들을 화제로 삼는 언론의 행위도혹세무민이다.과학과 합리의 시대에 거짓과 비과학적인 헛된 예언으로 이 사회를 불합리하게 이끌려는 세력이 있는 한 우리의 장래는 암담하다.
혹세무민하는 무당과 정치인,여기에 동조하는 언론이 과학과 합리의 시대를 역행하는 이 시대의 이단(異端)이라는 경계심이 널리 확산돼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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