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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시시각각

공포의 전염을 부추기는 대중선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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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1년 9월 18일 미국이 9·11 테러의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한 가운데 새로운 공포가 미국을 강타했다. ABC, NBC, CBS 등 미국의 간판 방송사와 뉴욕 포스트 등 뉴욕 주변의 언론사에 치명적인 살상력을 가졌다는 탄저균 포자가 동봉된 편지가 일제히 배달된 것이다. 이어 10월 9일에는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DC에 소재한 의회 의사당에도 죽음의 편지가 배달됐다. 탄저균 감염 소식을 TV에서 전해들은 수백 만 미국인은 현장의 피해자 못지않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미국의 수도가 위험에 빠졌다면 어디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도처에서 탄저균 감염과 비슷한 증세만 나타나도 응급실을 찾는 바람에 병원마다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방송 뉴스와 인터넷 사이트에 포진한 자천타천의 전문가들은 너도나도 탄저균의 위험을 부풀렸고, 생물학 테러의 공포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많은 사람이 집 밖을 나서기 두려워했고 우편물을 열어보거나 심지어 숨쉬는 것조차 안전하지 않은 듯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확률적으로 감염 우려가 거의 없는데도 언론과 인터넷은 대중의 과민 반응을 부채질했고, 급기야 두려움이 두려움을 부르는 공포의 전염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우병 논란을 보면 ‘공포의 전염성’을 실감케 한다. 근거없는 괴담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광우병의 공포를 확대 재생산하는 형국이다. 대중이 일단 공포에 휩싸이면 합리적 판단이나 논의는 불가능해진다. 흡사 국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듯 숨가쁘게 내뱉는 진보 논객의 선동적 외침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정부 당국자의 가녀린 목소리를 압도한다. 여기다 대정부 비판의 호재를 만난 야당은 먹잇감을 놓칠세라 사태를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제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사태의 진상을 한번 차분히 들여다보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과연 촛불집회를 열어 국민적 저항에 나설 일인지. 우선 광우병은 국민 건강과 관련된 만큼 털끝만큼의 위험도 감수할 수 없다는 주장을 보자. 비판론자들은 광우병의 위험은 확률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국민 건강이야말로 확률의 문제다. 살아가면서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위험은 언제나 도처에 널려있고, 우리는 확률을 근거로 그 위험에 대처한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중에는 몸에 나쁜 유해물질이 그득하다. 다만 인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허용치를 두고 관리할 뿐이다. 우리가 마시는 수돗물엔 치명적인 중금속이 다수 포함돼 있다. 다만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극소량이면 안전하다고 간주할 뿐이다.

1985년 해외여행을 한 미국인 2800만 명 가운데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된 미국인은 17명이었다. 그 확률은 160만분의 1이다. 질식사할 확률은 6만8000분의 1, 자전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7만5000분의 1, 익사할 확률은 2만분의 1, 차량 충돌로 사망할 확률은 5300분의 1이다. 미국인들은 이만한 확률 때문에 해외여행을 줄이거나 수영과 자동차 운전을 중단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대략 1억분의 1쯤 되는 광우병 발병 확률 때문에 쇠고기를 식탁에서 치운 적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는 지난달 18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 부인인 로라 부시가 마련한 쇠고기로 저녁식사를 했다. 미국 측이 만찬 메뉴로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준비하겠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이왕이면 32개월짜리 몬태나산 쇠고기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쇠고기 협상을 국민 건강을 희생한 굴욕 외교라고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는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지도자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광우병에 걸릴 위험을 자초하겠는가. 정히 대통령도 미덥지 못하다면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다만 근거없는 공포의 확대만은 이제 멈추자. 공포를 선동하는 광기가 광우병보다 더 섬뜩하고 무섭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