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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다큐 프렌들리’ 시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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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09면

일러스트 강일구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에 따라 TV 보는 취향도 달라진다. 드라마에 푹 빠져 있을 땐 세상에 신경 쓸 일이 적을 때다. 신나는 일이나 큰 사건이 있을 땐 뉴스만 기다려진다. 시사나 정치적인 문제에 어느 한쪽으로 입장이 정리됐을 땐 한쪽 편을 들면서 토론 프로를 보는 게 재미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뤄보면 시사 다큐 프로그램을 챙겨볼 시기가 가장 사안이 심각할 때다. 드라마도 눈에 안 들어오고, 뉴스 보도만 봐서는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잘 안 잡히고, 모르고 넘어가기에는 왠지 불안해지는 경우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요즘이 딱 그렇다. 영어 몰입화 교육이니, 공교육 자율화 방안이니, 의료보험 당연지정제니, 대운하니, 나날이 큰 이슈가 터지면서 이게 뭔가 생활을 통째로 바꿔 놓을 것 같긴 한데 제대로 알아먹지 않으면 뭐가 뭔지 모르고 넘어가기 십상인 것들이다.

미국 사회의 병폐를 한눈에 꿰뚫게 해주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가 정부에서 논의됐던 의료보험 개정안의 우울한 미래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지침서처럼 사람들에게 서로 권해졌다.

어려웠던 ‘의료보험 민영화’의 의미는 이 영화에서 잘려진 손가락 중 어느 하나는 비싼 치료비 때문에 봉합수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보여준 영상 하나만으로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당연지정제 완화와 민영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졌고 이에 대한 정책도 한 걸음 물러섰다. 대중 선동의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한편으로 시사 다큐멘터리가 대중을 교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지난주 방영된 ‘PD수첩’은 미국 소 수입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광우병의 위험을 알려줬다. 광우병에 걸려 비틀거리는 소의 모습, 미국 내에서도 검역이 철저히 이뤄질 가능성이 적다는 현지 관계자의 말, 한국인이 광우병에 취약한 유전자임을 보도한 이 영상의 힘은 폭발적이었다.

매일 먹는 음식을 먹고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만큼 무서운 게 없다. 나부터 광우병 패닉에 당장 시달렸다. 몇 년 전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외롭게 보도해 이 사회를 한 단계 진전하게 했던 ‘PD수첩’의 활약은 그나마 방송 저널리즘의 치열한 파고듦이 아니면 스스로의 환부를 도려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취약함을 방증해 주기도 했다.

광우병 공포 역시 정치권에서 해결해 내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안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는 이 시점에서 ‘PD수첩’이 그때만큼의 폭발력과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져올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정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광우병에 대해 위기 의식을 교육시킨 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필요하다면 전 국민을 줄기세포 전문가로 만들었던 그때처럼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후속보도로 더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치사율 100% 몹쓸 병의 공포 패닉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찾아가는 노력과 함께 말이다.

재미없고 어려운 시사 다큐멘터리를 권하는 이 사회는 확실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어 보인다. ‘불만제로’ 같은 소비자 주권 프로그램을 오락 프로그램처럼 즐기며 일상생활의 불안감을 달래야 하는 공포 만연의 시대다. 경제적인 소비자 주권이든, 정치적인 소비자 주권이든 확실히 되찾으려면 이 하수상한 시대에는 당분간 ‘시사 다큐 프렌들리’ 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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