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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손맛] 멸장·집장·육장·돔장 … 최씨 고집‘장’깊은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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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5대째 경주 최부자 집의 손맛을 잇고 있는 김숙씨(63·右)가 새내기 며느리 김혜옥씨(28)와 함께 멸장·집장·육장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송봉근 기자]

신라시대 왕궁 터인 경주 반월성과 경주국립박물관 사이로 난 들판길을 따라 북쪽으로 2㎞쯤 내려가면 고풍스러운 기와집 10여 채가 나타난다. 교동 한옥마을이다. 3300㎡ 남짓한 광장을 중심으로 안쪽엔 조선 선조 때부터 1950년 무렵까지 12대에 걸쳐 360여 년간 만석꾼 재산을 유지했다는 경주 최부자의 종택(宗宅)이 나온다. 입구 쪽엔 ‘최부자 가정식’이란 플래카드 아래 한식집 ‘요석궁(瑤石宮)’이란 간판이 서 있다.

요석궁은 신라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거처하면서 원효대사와 사랑을 나눠 설총을 낳은 곳으로 전해진다. 그 터에 최부자가 집을 지어 살아온 인연으로 음식점 명칭으로 쓰고 있다.

최부자는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 360년이 넘도록 부(富)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최부자 준(1884~1970)씨는 전 재산을 대구대(현재의 영남대) 설립 기금으로 내놓으면서 최부자 12대의 막을 내렸다.

준씨의 동생인 윤씨의 손자 며느리 김숙(62)씨는 “시댁이 대대로 누렸던 유일한 호강이 바둑과 함께 음식이었다”며 “까다로운 조리법을 전수 받느라 젊은 시절 내내 이을(몸살) 들며 살았다”고 말했다.

1인당 2만~10만원까지의 다섯 가지 메뉴 중 중간치(5만원·안압정식)를 주문해봤다. 신선로·떡갈비·전복·회·식혜 등 30여 가지 요리가 상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고급 한정식집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요리에 약간 실망스러웠다. 낌새를 눈치챈 듯 김씨는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을 알고 싶으시다고요”라고 물은 뒤 식탁에 올라온 밑반찬 ‘멸장·집장·육장·돔장, 그리고 사인지·수란채·육포’를 가리켰다.

녹둣빛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김씨는 설명했다. “사인지도 배추 백김치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소금과 새우젓을 일절 안 써요. 배추에 직접 담근 멸치액젓과 생조기를 넣고 절인 뒤 새우 끓인 물로 담고, 분홍빛이 선명해질 때쯤 손수 만든 실고추로 태깔과 맛을 조절해요. 맛이 완성되기까지 10여 차례 단계별로 체크해요.”

실제로 ‘장’자 돌림의 밑반찬들도 조리법과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컨대 멸장의 경우 무를 썰어 하루 동안 절였다가 3일간 물기를 빼고 멸치·간장·물엿을 넣어 6~7시간 졸여 완성시킨다.

5년 전부터 요석궁의 경영을 맡고 있다는 최부자 16대손 최재용(29) 사장은 “우리 집안 손맛의 뿌리는 조선조 숙종 때 사옹원(대궐 안의 음식 장만을 관리하던 곳)의 참봉이었던 3대조 최국선 공”이라고 말했다. 최 사장은 “다른 요리들은 비용이 워낙 많이 들고 조리에 걸리는 시간과 보관 문제 때문에 어른들의 생일 등 집안 주요 행사 때만 맛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시집살이 넉 달째인 며느리 김혜옥(28)씨는 “이런 호된 (부엌)수업을 받아야 할 줄 알았다면 청혼에 진작 퇴짜를 놨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기원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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