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53.93년 동양증권배 결승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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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이창호의 종반은 한폭의 거대한 추상화다.그의 뇌는 어둠에 덮인 공간을 탐사해 1초에 10여장씩의 그림을 그려내고 그것들은파노라마처럼 이어져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 추상화를 판독해 골프공을 찾아내는 인공위성처럼 「반집」을찾아낸다.반상에 존재하지 않는 반집이란 허수(虛數)를 신비롭게추적해낸다.이것은 서봉수9단이 가장 갖고 싶었던 수수께끼같은 능력이다.
『그 비밀만 안다면…』하고 徐9단은 목마르게 장탄식하곤 했다.『아아,그 비밀만 안다면.』 바둑사에 전례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능력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나는 이창호에게 「신산(神算)」이란 별호를 선사했다.4년전인가,한 독자가 『어린애한테 「神」자를 붙일 수 있느냐.아마추어적인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며 거세게 항의를 해왔 다.일리있는 항의였다.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창호의 「허공을 계산해내는 능력」은 점점 무서워졌다.
동양증권배 제2국에서 「반집」으로 역전패한 조치훈9단은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일본에서 趙9단은 끈기의 화신으로 불렸다.
뒷심은 누구보다 강했다.그런데 이창호란 청년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이창호 바둑은 강한 맛을 느낄 수 없었다.조훈현9단보다 아직 약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하지만 종반 끝내기가 문제였다.마법사의 주술(呪術)같고 요기(妖氣)같은 정체불명의 힘이분명 있었다.
6월8일.서울 호텔롯데 특설대국장에서 제3국이 시작됐다.스코어는 2대0.趙9단에겐 막판이었다.
10년전 趙9단은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9단에게 3연패후 4연승해 일본최대의 기성 타이틀을 따낸 일이 있었다.이듬해 명인전의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9단과 92년 본인방전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9단도 모두 3연패후 4연승이 란 기적의 제물이 됐다.
「역전의 명수」조치훈이 이창호마저 똑같은 코스로 보내버리기는힘들겠지만 영패는 최소한 당하지 않을 것이다.관계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조치훈은 다시 앞서나갔다.黑을 쥔 趙9단은 제한시간 3시간짜리 바둑에서 초반부터 한수에 47분씩 장고하며 전력을 기울였고 점심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차이로 이창호를 따돌리고 있었다. 시합때면 쑤셔오는 다리를 담요로 덮고 그 위에 고뇌의 상징인양 부러뜨린 성냥개비 조각을 무수히 뿌려놓은채 趙9단은 중반의 험로를 무사히 넘어갔다.
이창호쪽은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趙9단은 의아했으나 1,2국의 쓰라린 실패를 되새기며 마음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드디어 종반전.이창호가 서서히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아차 하는 사이에 한두집씩 날아가더니 차이가 휙 좁혀졌다.그래도 결승점은 코앞에 있었고 더이상 추격의 여지는 없어보였다.
하나 이 순간에도 최후의 고비가 남아있었음을 趙9단은 대국이끝나고서야 알았다.제195수와 제201수.분명 정수라고 믿었는데 이 사소한 막판의 두수에 패배의 악령이 숨었던 것을 그는 먼 훗날에야 알았다.
이창호는 그 찰나에 신들린듯 날아들었고 계가하니 白을 쥔 이창호의 반집승.또다시 반집이었다.그건 운이나 실력이라기보다 차라리 마법사의 주술이었다.
趙9단은 망연자실했다.그는 넋을 잃고 기보를 살피더니 이창호에게 물었다.『반집 맞아?』이창호가 수줍은듯 고개를 끄덕였다.
趙9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18세의 이창호는 3대0으로 조치훈을 꺾어버렸다.세계대회를 2연패하며 1억원의 상금을 거머쥐었다.세판 다 역전승이었고 기적같은 반집이 두번이나 있었으나 조치훈의 30년공부는 이창호의괴력앞에서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졌다.
서울을 떠나며 조치훈은 다시 말했다.『이창호는 아직 조훈현만큼 강하지 않다.그러나 이창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끝내기하나만 강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의 양심을 걸고 조치훈은 패배를 끝끝내 승복할 수 없었고 이창호는 여전히 안개속에 숨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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