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이 삼촌의 꽃따라기] 한계령풀 … 어쩌자고 그 높은 데 피었느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0면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중략)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의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왜 한계령이 오지 말고 내려가라 하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 것 같다. 한계령 능선에는 한계령풀이라는 희귀식물이 자라니까 보호해야 한다고, 함부로 발 들이지 말라고 경고를….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라 장덕수 시인에게는 죄송하지만 풀꽃에 미친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한계령풀은 한계령에 임도를 내던 중에 발견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초 발견지의 지명을 딴 이름은 그 외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면 가치가 떨어져 보이지만 한계령풀만은 그렇지 않다. 높고 험준한 곳에서만 사는 한계령풀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한계령풀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커다란 군락을 이뤄 핀다. 간혹 백두대간 산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한계령풀 군락을 만나 자기만의 비밀정원으로 삼는 이도 있다. 그러고는 매년 그곳에 가서 혼자 웃다 온다.

한계령풀은 매자나무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10~20개의 노란색 꽃이 조르륵 달린 모습은 매자나무의 꽃으로 오인할 정도로 많이 닮았다. 4월이면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것 같은 가느다란 줄기를 땅 위로 내보인다.

땅속의 실처럼 가느다란 뿌리줄기는 20~50㎝ 아래까지 들어가고 그 끝에 둥근 덩이뿌리가 달린다. 이 덩이뿌리 때문에 북한에서는 ‘메감자’로 통한다. 이들의 꽃축제는 4월 중순께부터다. 30~50㎝ 높이로 자란 줄기 끝에 기다랗게 휘어진 꽃차례를 드리우기 시작해 5월 동안 열매를 맺고는 6월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깡그리 사라진다. 그래서 한계령풀은 생활상 자체가 신비스럽다.

워낙 귀하신 몸이라 한계령을 포함해 가리왕산, 금대봉, 오대산, 점봉산, 태백산 등 출입이 쉽지 않은 깊은 산에나 가야 알현할 수 있다. 가리왕산의 경우는 1년 내내 통제를 하지만 평창국유림관리소에서 매년 4월 말께 시행하는 ‘우리꽃보기 행사’에 참가 신청을 하면 해당기관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한계령풀을 비롯한 여러 풀꽃을 감상할 수 있다. 웬만한 산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꽃이므로 몇 시간이 넘는 힘든 여정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만나보는 보람은 충분하다.

올해는 축축한 안개비와 난무하는 칼바람 속에서 한계령풀을 만났다. 때아닌 추위에 달달 떨며 촬영하다 보니 밤에는 이보다 더 추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연녹색 잎과 연약한 줄기를 가진 한계령풀은 내가 겪는 것보다 몇 배나 더한 추위를 맨몸으로 인내하면서 눈앞에 피어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한계령풀만의 진정한 매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아름다움의 가치가 새삼 높아 보였다.

유행가 가사에서 한계령은 오지 마라 내려가라 한다지만 한계령풀은 자신을 보려면 오르라 오르라 하는 것 같다. 아니, 오지 말고 내려가라 내려가라 한대도 한계령풀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새벽같이 일어나 강원도의 높은 산을 오르고 또 오를 것이다. 어쩌자고 그 높은 곳에 피어서 사람을 오르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범접하기 힘든 그곳에 피어 있기 때문에 나는 간다, 한계령풀아.

글·사진 이동혁 http://blog.naver.com/freebowl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