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통신회사도 동의서 요구 한 번 서명하면 취소하기 힘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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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회사에 근무하면서도 매매계약서에 이런 항목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차 회사들이 차를 팔면서 ‘신용정보 제공·활용 동의서’를 받는다고 지적하자 현대차 관계자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사생활 보호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관계자는 “관행적으로 개인정보를 그런 식으로 활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자동차회사 직원들의 대답도 비슷했다. 1995년 신용정보 이용에 관한 법률이 생기면서 신용정보 제공 동의서를 받기 시작했고, 2001년 이 법이 개정되면서 정보 제공처를 명시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국내에서 팔린 신차는 모두 120여만 대.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소비자의 개인정보가 여기저기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계약서에 명시된 업체가 자동차회사로부터 받은 고객 정보를 자신만이 이용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기업에 넘겼는지도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기업들의 잘못된 관행=자동차회사들은 금융회사에 비해 개인 신용정보 관리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걸 수집해 제3자에게 제공해 온 것은 그만큼 고객 사생활 보호에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다. 자동차회사뿐 아니라 유통 및 통신업체와 카드회사·보험회사 등 금융회사들도 소비자 개인정보를 광범위하게 마케팅 활동에 이용하고 있다.

현재 12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한 롯데멤버스카드의 경우 가입 신청서에 자세한 개인정보와 함께 롯데쇼핑·롯데호텔 및 13개 계열사에 정보를 제공하는 데 동의하도록 한다. 신세계 포인트카드는 회원 가입과 함께 OK캐쉬백에 자동 가입돼 개인정보가 여기로 넘어가도록 돼 있다. 신세계 회원은 1100만 명이 넘는다.

한 업계 관계자는 “1990년대 OK캐쉬백이 회원 가입을 통해 모은 개인정보를 마케팅에 활용한 것이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로 소개되면서 기업마다 마구잡이로 고객 정보를 모으고 이를 제휴업체에 제공하는 관행이 생겼다”고 말했다.

◇제재 근거도 약해=감독기관들은 기업들의 개인정보 수집과 활용이 도를 넘었다는 점을 이제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제재할 방법은 별로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최근 경찰은 하나로텔레콤이 가입자의 신용정보를 자회사에 넘기고 텔레마케팅에 활용한 것을 ‘신용정보 제3자 불법 공여’로 보고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소비자가 제3자 활용에 동의한 정보에 대해 단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박주영 금융위원회 사무관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받은 경우 개인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법이 보장하고 있다”며 “읽어보지도 않고 동의했다면 소비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최은실 한국소비자원 부장은 “최근 기업들의 개인정보 활용이 지나치긴 하지만 이것으로 피해를 봤거나 분쟁이 생기는 경우에만 공공기관이 개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감독기관 측은 “소비자들이 스스로 자기 정보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주문한다. 소비자들의 무심함도 큰 문제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용정보가 여기저기서 막 새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신용정보 제공란에 서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보 제공 및 활용에 동의했다가 이를 취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얼마 전 자동차를 샀던 소비자는 “자동차회사에 정보 제공 동의를 취소하려고 문의했으나 방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현재 입법 예고된 개정 법안은 동의를 철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았다”고 말했다. 개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려면 올 가을은 돼야 할 것으로 알려졌다. 

양선희·한애란 기자

현대자동차는 매매계약서의 절반 정도를 ‘신용정보 제공·활용 동의서’에 할애한다. GM대우를 판매하는 대우자동차판매와 르노삼성자동차·쌍용자동차도 계약서 하단에 비슷한 내용의 문구로 고객의 동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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