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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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1945(9) 산에 그늘이 지기 시작하는 길을 은례는 아이를 업고 걸었다.
『일본은 뭐 일억옥쇄니 본토사수니 하고 있다면서요.아니 죽어서,다 죽어 자빠져서 무슨 놈의 본토사수란 소린지.죽어서 귀신이 나라 지키나.』 은례의 눈이 둥그래진다.춘식이 입에서 이런말이 나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던 은례였다.
『난 아무리 잘났네 해도 왜놈들 안 믿어요.죽어 자빠질 날만받아 놓았구나,그렇게 밖에요.생각해 보세요.빠가야로 해 가면서칼 빼드는 사무라이 곤조 하나 믿고,싸움이 됩니까.미.영이 그렇게 만만한가요.붙을 상대가 따로 있지요.』 『얘,누가 들을까무섭다.』 『다 그런 거예요.중국이야 이 빠진 호랑이었으니 그렇다 치고,미국은 다르지요.대항이 되겠어요.어림도 없는 소리.
씨도 안 먹을 소리지요.』 『너는 어디서 그렇게 이상한 소리만듣고 돌아다니니.불령선인이 따로 없구나.』 『가진 거 없는 놈이 왜 무서운 게 없는 줄 아세요.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알몸 가지고 가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에요.』 『점점 못하는 소리가 없어.』 『순사놈이나 한 반쯤 죽였다 놓고 감옥소에나 다녀오는 건데 잘못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 『춘식이는 이제 죽었다고 세상이 다 그랬을 땐데,누님만 몰랐었군요.』 『너같은 순둥이가 어쩌다가 무슨 일을 쳤는데.』 『논물 대다가 그랬지요.왜놈 순사한테 술잔깨나 사 주고 다니던 그 너른골에 장가라고 있잖아요.아 그놈이 같은 봇물을 쓰는데,허지 말아 허지 말아 하는데도 계속 제 논으로 물을 돌리는 거예요.이른 봄그 가뭄에 눈에 불이 날밖에요.
그래서 이놈 새끼 부닥치기만 하면 삽자루로 등뼈를 으스러뜨려놓는다고 밤을 새워 기다렸지요.요게 가만히 보니까 새벽이면 꼭그짓을 하더라구요.』 『아니 그렇다구 사람을 다치게 해?』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지요.만나자 마자 논두렁에 메다꽂고는 작신작신 밟아댔는데,제놈이 잘못이 있으면 가만히나 있어야지요.요시다인가 하는 그 왜놈 순사를 갖다 붙여서는 나를 주재소로 끌고 가는 게 아니겠어요.살인죄를 씌우겠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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