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시대명음반>베토벤 소나타 "비창""열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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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산업화가 극도로 진행돼 모든 것이 차가운 정밀함 속에 갇혀버린 오늘날 에드빈 피셔와 같은 구시대 피아니스트를 그리워한다는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 발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처에 냉정함과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고 사방을 둘러봐도 싸늘한 눈빛만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이런 현실에서 시대를 초월한 그리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수록된 피셔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에서 현대식 연주의 가장 선명한 특징인 기계적으로 단련된 기교와 감정의 무료함은 그 어디에도 없다.
피셔의 연주는 비록 60년전 녹음의 부정확성은 있다 하더라도항상 풍부한 영감과 넘쳐흐르는 낭만정신으로 고양돼 있다.또 따뜻한 인간애와 삶에 대한 관조를 저변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아름다운 정감을 가진다.
특히 헨델의 『클라비어 조곡 제3번』과 함께 수록된 소나타 제31번에서 펼쳐지는 깊숙한 사념(思念)의 세계엔 삶의 참된 의미가 숨겨져 있다.그의 템포는 빌헬름 박하우스의 그것보다 훨씬 느리고 터치는 더욱 무겁고 어둡다.
박하우스와 비교할 때 기교의 탁월함이나 외형적 표현의 정확함에서는 뒤지지만 프레이징과 템포는 훨씬 의미심장하게 베토벤의 내면세계를 포착하고 있다.
특히 잘 알려진 『비창』『열정』소나타에서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중에서도 슈나벨 이외에는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었던 심연의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이 소나타 연주는 비슷한 시기에 녹음된 그의 베토벤『제7번 소나타』레코딩과 더불어 높은 경지에 도달한 거장의 심오한 음악세계를 전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a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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