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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기쁨 <59> 일본 명품 와인 만드는 사람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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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35면

4월 초 나가노에 있는 일본 고품질 와인의 창시자격인 샤토 메르시앙을 방문했다. 도쿄 신주쿠에서 북서쪽으로 특급열차를 타고 달린 지 약 3시간, 와이너리가 있는 시오지리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역에 내리자 포도, 특히 와인으로 번성한 산지답게 와이너리를 선전하는 광고판과 와인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역 앞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아침 기교가하라(桔梗ケ原)로 향했다. 이곳은 표고가 높고 근처에 강이 없는 지역 특성상 벼농사는 맞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빗물만으로 재배할 수 있는 사과와 배, 포도 같은 낙엽과수를 심었다.

샤토 메르시앙 기교가하라 메를로의 포도밭 앞에 서니 4월임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겨울에는 강추위에 포도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 줄기마다 짚을 감아 보온을 유지한다. 이런 기후 때문에 원래 이곳에는 추위에 강한 콩코드, 나이애가라, 델라웨어 같은 미국의 식용 포도 품종을 심었다. 그러다 본격적인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신념에서 프랑스 보르도의 주요 품종인 메를로를 심기 시작했다.

이번 방문에서 필자는 와인 양조 책임자 아지무라 고세를 만나 시그니처(signature)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지무라는 체구는 작지만 골격이 탄탄하며, 소탈한 성격에 묵묵히 일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장인 스타일이다.

샤토 메르시앙의 양조 책임자 아지무라 고세(왼쪽)가 오크통의 와인을 뽑아 필자에게 건네고 있다.

1998년 10월 초, 아지무라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시 샤토 메르시앙의 대표 상품은 기교가하라 메를로였다. 양조팀의 젊은 직원이 기교가하라 메를로보다 뛰어난 와인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지무라는 그해에 그 제안을 실행에 옮겨야 할지 다음으로 미뤄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10월 초면 중요한 수확기인데 연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 하나 하나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양조팀을 한자리에 모았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시그니처에 도전하자고 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진지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음을 굳힌 아지무라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장 포도밭으로 가! 포도밭을 지키는 재배가가 아니라 양조팀인 너희가 포도밭에 가서 직접 최고의 포도송이를 골라 와!”

시그니처는 최고 해에만 생산한다. 시그니처의 역사는 포도농사가 신통치 않았던 1998년 시작되는데 2000년과 2003년에는 생산되지 않았다. 와이너리에서 2001년산과 2002년산을 시음해 봤다. 아지무라는 2002년산이 빼어난 빈티지라고 말했지만 필자는 미디엄 보디면서 우아한 2001년산이 마음에 들었다. 포도농사가 잘된 해에 좋은 와인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지만, 2001년처럼 평범한 해의 와인에서는 독특한 개성이 더 잘 드러난다.

엄동설한의 황야 같은 와인, 그 안쪽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신맛. 검은 과일과 가죽, 스파이스 향기는 이땅의 화산재 토양에서 비롯된다. 베리, 카카오, 커피, 초콜릿 맛이 몇 겹으로 포개져 있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맛은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로 와인을 만드는 재배가들과 와이너리 사람들의 영혼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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