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와인의 향기는 길고 인생은 짧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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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18면

와인과 예술의 결합, 이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와이너리는 샤토 무통 로트실드(Chateau Mouton Rothschild)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 접해 보고 싶은 보르도 최고급 와인 중 하나. 이 샤토는 세계 최고의 레드 와인 산지인 프랑스 메도크 지역에서도 가장 강성의 와인을 만들고 있는 포이약 마을에 위치해 있다.

와인 레이블 이야기 <5>

샤토의 역사는 영국에서 금융으로 명성을 떨치던 로트실드 가문과 이어진다. 이 가문이 포이약에 처음 자리를 잡은 해는 1853년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보르도 메도크 지역의 61개 그랑 크뤼 샤토의 서열이 정해지던 1855년보다 2년 전의 일이다. 최초의 샤토 이름은 샤토 브란 무통(Chateaux Brane Mouton)이었지만 구입 후 ‘샤토 무통 로트실드’로 개명하게 된다.

그러나 샤토는 1등급 대열에서 빠지고 2등급으로 정해지면서 항상 최고를 추구했던 로트실드 가문은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이때부터 샤토는 2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을 하게 되고, 이 가문의 많은 노력은 와인 역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주변 샤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노력의 흔적들이 무통 로트실드 와인 레이블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지금까지 역사를 함께하고 있다.

첫 사건은 1924년에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모든 와인은 샤토에서 병입하지 않고 와인 중계상에 의해 병입되었다. 이 상황에서 무통 로트실드는 자신이 만든 와인 전량을 샤토에서 병입했다. 또한 이 사실을 와인 레이블에 직접 새겨 넣음으로써 획기적인 진전과 신뢰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1924년의 레이블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그래픽 디자이너 장 카를루(Jean Carlu)가 작업했다. 양(무통의 상징)의 형상과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다섯 로트실드 가문의 상징인 5개의 화살표를 최첨단 예술 양식을 도입한 포스터 형식으로 디자인했다.

그리고 그 속에 ‘Toute la recolte mise en bouteille au chateau(수확한 모든 것을 샤토에서 병입)’라는 문구를 써 넣었다. 이로써 와인을 생산한 샤토가 그 와인의 품질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게 됐다. 이후 많은 샤토가 이 방식을 따라 했으며 결국 70년대 이후에는 모든 보르도 샤토들이 직접 병입하는 풍토를 만들어 냈다.

무통의 레이블에 대한 생각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의 명성이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는 1945년의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로트실드 남작은 레이블에 예술작품을 도입하기로 했고 그 작업을 무명의 젊은 화가 필립 줄리앙(Philippe Jullian)에게 의뢰했다.

작가는 몇 개의 스케치를 보내 왔고 그중 처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V(Victory의 첫 글자)자를 포도나무와 더불어 그린 그림이 채택됐다. 45년도는 전쟁으로 어려운 해였지만 날씨가 무척 좋아 20세기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로 추앙받는 해이기도 하다. 전쟁의 아픔을 와인의 품질로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었던 해, 그래서 무통의 45년 레이블은 많은 사람에게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 인기는 바로 상업적인 마인드와 연결되었고 이후 무통은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레이블로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품질도 크게 향상됐고, 그 결과 가문의 숙원이었던 1등급 진출이 드디어 1973년에 이루어진다.

이 특별한 해의 레이블은 73년에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를 기리며 그가 1959년에 그린 춤추는 바쿠스 신을 기쁨 대신 사용했다. 그리고 그 속에 ‘Premier Cru Class en 1973(1973년 1등급 분류)’과 더불어 ‘Premier je suis, second je fus, mouton ne change(현재 무통은 1등이다. 과거의 무통은 2등이었다.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무통 와인 레이블에 새겨진 그림들은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예술인들의 작품이다. 무엇이든 인간이 만든 최고의 경지는 예술과 통하고 있음을, 또는 통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데 무통의 레이블들을 보고 있으면 예술도 길고 와인도 길다. 단지 인생만이 짧아서 예술을 감상할 시간도, 좋은 와인을 즐길 시간도 모자란 듯하다.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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