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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과주말을] 지리산으로 들어간 시인 속세에 안부편지 띄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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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리산 편지
이원규 지음,
대교베텔스만,
239쪽, 9800원

지리산에 가면 계곡 굽이굽이 헤집고 다니는 BMW 오토바이를 만날 수 있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47)의 ‘백마’다. 그는 11년 전 서울을 떠나 지리산 자락으로 들었다. 회색 도시에서 찌들었던 몸과 마음 달래보고자 겨우 찾아낸 연명의 방편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지리산 품 안으로 찾아 들어가 어느덧 지리산의 한 풍경이 되어버린 시인의 산중 일기다.

책 받아 들고 반가운 마음에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벚꽃 소식 물었더니 시인은 “지금은 자운영이 볼 만할 것”이라 이른다. 마침 책에도 자운영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구례 들녘 얘기가 실려있다.

“시방 구례군의 드넓은 논들은 자운영꽃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말 그대로 거대한 보랏빛 꽃구름이 온 들녘에 안착한 것이지요. 구름이 어찌 하늘에서만 거처하겠는지요. 아래로 내려오면 비가 되고, 그 비가 꽃을 피우고 강물로 흐르다 수증기로 오르면 다시 구름이 됩니다. 이처럼 태초부터 구름과 비 사이에 꽃이 있었지요.” (36쪽).

시인은 계절에 따라 변모하는 지리산 자락의 네 가지 풍경을 중계하듯이 들려준다. 가령 알 낳으러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는 황어를 보며 봄이 당도했음을 알고, 연초록 바람이 산을 뒤덮어 별안간 시력이 배가되는 걸 느끼면 오월이 시작했음을 깨닫는 식이다. 시계 없어도 시간의 흐름을 알고, 달력 없어도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산 안에 들면 그럴 수 있단다.

그렇다고 시종 야생화 자랑이나 늘어놓는 건 아니다. 시인이 전하는 우리네의 심정적 고향은, 침울하고 답답한 모습이다. 몇 구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시의 자식들이 키우다가 늙고 병들자 고향으로 보내온 애완견들이 마을을 누비고, 1년에 어린아이가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아 동네 유일의 초등학교마저 폐교될 지경이다. 총 인구 3만 명 수준의 군 단위 읍내엔 다방과 단란주점 등이 100개 이상 성업 중이고, 농촌 총각의 4분의 1이 국제결혼을 하는 현실이다.

전 재산과 맞바꾼 오토바이 부르릉대며 오늘은 피아골로, 내일은 악양 벌판으로 만행 떠나는 시인이 부럽다. 시인이 지리산에 들어 십 년이 넘으면 선승이 되는 모양이다. 맑고도 단호한 눈을 지닌 구도자 말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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