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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프리즘] 중국 민족주의, 통제불능 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서방 세계에 대한 중국의 오래된 견제 심리가 분출한 것일까. 중국 사회에 애국주의 열풍이 번지고 있다. 지난달 14일 발생한 티베트(시짱·西藏) 시위가 직접적인 발단이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단순한 애국심의 표현을 넘어 통제 불능의 외세 배척주의로 치닫는 조짐이라는 데 있다.

명문 칭화(淸華)대를 갓 졸업한 기업인이 ‘안티 CNN’ 사이트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시안(西安) 등 몇몇 도시에선 프랑스 유통업체 카르푸에 대한 불매 운동이 시작됐다.

인터넷사이트 텅쉰(www.qq.com)이 올림픽 성화를 수호하자며 3000만 명의 참여자를 모집했다. 유럽과 미국의 화교들이 벌이는 ‘친중국 시위’에 1만 장의 오성홍기를 보내자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붉은색 하트 모형에 오성홍기를 새긴 ‘홍심(紅心)’이 애국심의 상징물로 인터넷에서 돌고 있다.

1899년에 시작돼 1년 동안 중국을 휩쓸었던 의화단(義和團)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 농민 위주로 구성된 의화단은 당시 중국을 침략하던 영국·독일·일본 등 식민제국에 저항한 단체다. 반외세주의로 똘똘 뭉쳐 저항을 지속했던 극렬한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올해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은 중국에서 외세 배척 풍조가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왜 그럴까. 우선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공산당의 방침이 이 같은 과열 민족주의 흐름을 낳은 것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 외교부는 티베트 사태에 대해 “인권 문제나 종교 문제가 아니라 조국의 분열이냐 통일이냐의 문제”라고 정의했다.

모든 국면을 통제하는 공산당이 티베트 사태의 본질을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자 신화통신·인민일보·CC-TV 등 관영 언론과 학계는 물론 인터넷사이트까지 앞장서 하나의 논리를 반복하면서 확대되고 있다. “티베트 사태는 중화민족을 분리시키려는 음모에서 비롯됐고 서방 세력이 배후에서 돕고 있다” “서방 세력이 중화민족의 대부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굳이 공산당이 시킨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오케스트라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중국사회에 내재된 가공할 획일주의가 느껴진다. 중국 사회에 중산층이 생겨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할 법한데도 그렇지 않다.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국익과 애국 논리 앞에선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분위기 때문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공산당과 정부가 애국심을 동원해 중국 정부의 인권 보호 및 소수민족 정책 실패를 은폐하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공산당의 일당 지배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그러나 큰 흐름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소수 의견에 불과할 뿐이다.

미국 CNN과 영국 BBC 등 대표적인 서방 언론들의 크고 작은 티베트 관련 오보 역시 이런 분위기 조성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중국 정부와 사회는 이를 기회 삼아 그동안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서방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해 집중 포화를 쏟아 붓고 있다. 중국을 서방의 잣대로 재단해 비판해 온 서방 언론에 대해 쌓인 분노가 폭발했을 수도 있다. 또한 청나라 말기 이후 오랜 내전, 일제 침략, 가난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이제 경제 발전과 올림픽 개최를 통해 회복되기 시작한 자부심이 상처받는 데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문제가 있다. 중국 정부가 촉발시킨 애국심이 자칫 통제불능 상태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관영 언론들은 민간의 분위기가 과격해지자 이를 누그러뜨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번 굴러간 바퀴는 쉽게 서지 않는다. 글로벌 시대에 퇴행적인 민족주의가 중국의 장기적 발전과 이익에 도움이 될지 미지수다. 배타적인 애국주의는 세계화가 주류인 개방 시대에 중국의 발등을 찍는 부메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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