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10만리>4.大理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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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동파문화연구소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여강시장.세계 어느 곳을 가나 시장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현장감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여강시장도 옛날 우리나라 시골 장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수백개의 점포가 줄지 어 있었고,사이사이 목판장수들이 물건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맨 먼저 탐사팀의 눈에 띈 우리 문화는 짚방석.우리나라 시골에서 여인네들이 부엌일할 때 사용했던 짚방석을 나시족 여인들도깔고 앉아 있었다.
탐사팀이 여강시장에서 발견한 것은 대소쿠리.대소쿠리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를 휘어 심(芯)으로 하고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인데 우리는 소쿠리라고 불렀던 대나무 제품이다.우리나라의 대나무 석작,반짇고리 같은 제품은 동남아에서도 흔히 볼 수있지만 오직 이 소쿠리만은 여강에서 처음 발견한 것이다.
여강 사람들은 합죽선도 사용하고 있었다.합죽선에서는 우리 민족의 뛰어난 예술 감각이 드러난다.대수롭지도 않은 합죽선이지만그 위에 여러가지 문양을 만들어 그려 넣는다.그래서 투박하지 않고 정감이 간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합죽선이 아직도 중국의 오지에서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대견스럽게 보였다.
필자는 기대와 흥분으로 시장을 헤매다 목판에 담아 팔고 있는엿을 발견했다.그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탕수수로 만든 조청 비슷한 것은 여러번 보았다.그러나 정작 진짜 엿은 여강시장에서처음 보았기 때문에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나시족의 문화 속에는 우리의 것과 닮은 것이그리도 많이 눈에 띄는 것일까.옛날 어느 시점에 민족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교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풀릴 수 없는수수께끼다.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와 나시족 모두 어느 한곳으로부터 동일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그럴경우 우리나라와 나시족 문화에 영향을 끼친 그곳은 어디일까.
***나시족「나」「너」호칭 똑같아 필자는 마지막으로 나시족의기본언어를 조사하면서 다시한번 놀랐다.우리나라말 「나」를 그들은 「냐」라고 하고,「너」를 그들도 「너」라고 부른다.그들의 기초문법도 대개는 우리와 같다.그러나 어휘는 우리와 상당히 달랐다.아마도 오랜 세 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는 동안 바뀌었을 것이다.
여강시장을 찾은 이튿날 탐사팀은 대리(大理)를 향해 이동했다. 미니버스가 고개를 넘은 다음부터는 평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이정표가 스쳐 지나갔다.「大理 160㎞」.
대리는 고산준봉들과 호수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다.
지금으로부터 1천2백여년 전 중국의 唐나라 시절 이곳에는 남조왕국이 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이 남조(南詔)왕국은 궁벽한 곳에 있으면서도 당나라와 맞먹는 높은 문화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당나라는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지 마침 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윈난성(雲南)으로 쳐들어 갔다.이것이 당나라 현종때니 고구려가 망한지 70여년 후의 일이다.당군은 1차전에서참패했다.당나라는 다시 정예병 6만으로 침략을 강행,윈난성軍과혈전에 혈전을 거듭했으나 윈난성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6만명이넘는 당군은 대리 서이하(西珥河)강변에서 한사람도 남지 않고 모조리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당나라 대장 이밀(李密)도 당군이전멸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해버렸다.1천2백여년이 지난 지 금도 흙을 파면 당시의 유골 파편이 나온다고 한다.
***唐정예군 6만 무참히 전멸 그런데 미심쩍은 것은 대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장의 그림이다.필자는 그들이 남긴 한장의 그림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우선 그림속에 앉아있는 아홉사람을 보면 모두 도포를 입었다.고구려 고분벽화의 왕이나 귀족들이입고 있는 도포와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다음은 그들의 머리모양이다.모두 상투를 틀고 있는데 머리에 상투를 튼 것도 옛 우리 조상들의 독특한 풍속이었다.
그런데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림의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새대(鳥竿)다.이와같은 새대가 전해오는 것은 우리나라.태국.인도네시아.동부 시베리아 뿐이다(인도의 것은 고대 경전인 리그베다에 기록되어 있다).
그림에 보이는 상투.도포.새대,이 세가지가 꼭 들어맞는 것은오직 우리와 남조왕국 사람들 뿐이다.
이 그림이 시사하는 것을 유추해보면 당군과 싸워 대첩을 거둔대리의 서이하 전투는 당나라의 유배지 농우.산남등지에서 남하한용맹한 우리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이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줄 사람도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오직 필자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이 그림 한장 뿐이다.그러나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이 그림이 우리 민족이잃어버린 역사의 한 장면을 시사해주고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림 한장이라도 그냥 보아 넘겨선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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