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천년의 사랑" 양귀자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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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천년전에 한 쌍의 연인이 지금의 파키스탄 부근 혹은 히말라야 근처의 북인도 지방이나 네팔에 살고 있었다.권세가문의 외동딸 수히치와 천민의 아들인 아힘사.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신분 차이로 사랑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그로부터 다시 1천년이 흘러오인희와 성하상은 자신들이 1천년전에 서로 죽기까지 사랑했던 연인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상태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하지만 전생에 못이룬 사랑의 행복이 금생에서 이루어지려는찰나 오인희의 불치병으로 두 사람 은 다시 이별한다.비록 실패했으나 『천년의 사랑』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마저 승리하는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한편 아무리 간절한 인간의 염원도 결국에는 우주의 섭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겸허를 깨닫게 해준다.
작가는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역사에 이 소설을 바치는 동시에 과학적이고 합목적적인 서구 이성에 짓눌려온 천년의 지혜 곧 동양정신을 되살피고 되살리는 일에도 고심한다.어느 대목에서 작가는『태어나면서 우리는 물려주고 물려받는 교육에 길들여져 왔습니다.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도모하는 자는 낙오되기 일쑤였습니다.낙오되지 않으려면 더욱 기성의 지식체계를 숭상해야하는 풍토에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입니다.우리는 점점 굳어졌고정신을 해방시키는 작업은 괴력의 절단기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라고 적었는 바,우리는 기성의 지식체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며 그러한 체계가 만들어 놓은끔찍한 세계의 불행을 몸소 경험해왔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보았듯 양귀자는 가끔씩「괴력의 절단기」를 들고 나서는 소설가다.때문에 이번 소설을재미있게 읽기 위해 어떤 독자는 지금까지 즐겨왔고 고수해왔던 기존의 소설관.세계관을 단절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작가는 성하상이라는 주인공겸 화자를 통해『앞으로도 나는 세상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몇차례나 말하게 하기 때문인데,그것은 이 소설이 있을 법한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하는 서구 중심 의 근대소설과는 전혀 다르게 쓰여지고 있다는 공표인 것이다.또『당신이 알고 있는 논리만으로는 현실의 반대편을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는 전언에서 보듯 괴력의 절단기는 논리의 세계를 쪼개고 명상의 세계를 파고든다. 후일담과 자전소설이 득세하는 요즘에 절실한 것은 소설에대한 자의식과 소설가로서의 자중자애다.직접 체험하거나 간접적으로 엿본 경험을 주절 주절 나열하기만 하면 소설이 된다고 믿는것은 순진하다.장이모(張藝謨)와 궁리(鞏리)가 주연 한『진용』을 통해 어렴풋이 맞보았던 동양적 상상력으로 우리를 흥분시킴은물론 그 흥분으로 우리의 삶을 반성시키는『천년의 사랑』은 진짜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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