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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해외유학 가니? 우린 ‘산촌유학’ 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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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12면

소백산 자락에 감싸인 충북 단양의 생태마을 ‘한드미’에 올 3월 초등학생 14명이 유학 왔다. 시골에 연고가 전혀 없던 막내 승완(7·오른쪽에서 넷째)부터 맏형 경원(12·오른쪽에서 다섯째)까지 김동주 센터 사무국장(맨왼쪽)의 지도로 매일 방과 후 신나게 논다. 준호(11·왼쪽에서 셋째)와 찬호(8·왼쪽에서 여섯째), 현준(11·오른쪽에서 여섯째)과 형후(9·왼쪽에서 다섯째)는 형제가 같이 온 경우다. 단양=신동연 기자

#1. “찬호야, 자전거 왔다.”16일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의 한드미 마을. 마을회관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진달래 화전을 만들던 찬호(8·대곡초 2)가 손에 하얀 찹쌀가루를 묻힌 채 뛰어나왔다. 굽이굽이 소백산 안자락까지 택배돼 온 자전거를 보고 찬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와, 정말 내 건가”. 형 준호(11·대곡초 5)가 멀쩡한 자기 자전거를 놔두고 “나도 타 보자”며 달려든다. 찬호는 얼른 새 자전거에 뛰어올라 신나게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준호가 금세 따라붙는다. 둘 다 좀 전까지 한드미 계곡에서 노느라 바지 가랑이가 흠뻑 젖었으나 전혀 차갑지 않다.

개구리 잡고 감자 굽고…시골서 1년 보내는 수도권 초등생들

경기도 의정부 용현초등학교를 다니던 준호·찬호 형제는 지난달 이곳으로 ‘유학’왔다. 맞벌이하는 부모는 할머니에게 이들의 육아를 맡겼었다. 그래서 준호는 학원을 참 많이 다녔다. 공무원인 엄마가 퇴근해 집에 오는 오후 8시까지 전 과목 학원을 돌았다. 이렇게 탁 트인 봄 하늘 아래서 자전거 바람에 젖은 옷을 말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2. 서울 목동에 사는 제민(11·월촌초 5)은 4학년이던 지난해 가을 학기를 전북 완주의 고산 산촌유학센터에서 지냈다. 유학을 가기 전 제민은 아토피 피부로 고생했다. 게다가 매일 학교만 다녀오면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어머니 장유진(43)씨는 “4학년만 돼도 특목고 준비를 시키는 학교 분위기 때문에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담임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은 아이가 집중력이 약하다며 학습장애 테스트까지 권할 정도였다. 장씨는 “그러던 아이가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자연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많이 받아서인지 반 년 만에 자신감이 늘고 건강해져 돌아왔다”며 만족해했다. 제민은 한동안 다시 고산으로 가고 싶다고 투정도 했지만, 이제는 그곳에서 사귄 농촌 학생들과 가끔 통화하며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도시 아이들이 산과 들에서 한 학기 이상 배움의 기회를 갖는 ‘산촌유학’이 확산되고 있다. 2006년 10월 시인이자 교사인 김용택씨가 섬진강 변 전북 덕치초등학교(063-643-5063)에서 ‘섬진강 참 좋은 학교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비슷한 프로그램을 갖춘 곳이 세 곳 더 늘어났다. 전북 완주의 고산센터(063-262-3336), 강원도 양구의 철딱서니학교(033-481-7479), 충북 단양의 한드미 마을(043-422-1293) 등이다. 학교와 학원을 잇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학습장애·자폐·무기력증 등을 겪게 된 아이에게 자연의 치유를 받도록 해주려는 부모들의 바람과, 폐교 위기에 처한 시골 분교와 마을 경제를 살려 보려는 농촌 지도자들의 의욕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한드미 마을 유학생들은 대곡초등학교 분교까지 매일 30~40분을 걸어서 다닌다. 한 반이 10명 이내여서 일대일 수업을 한다(위). 한드미 계곡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한겨울만 제외하면 매일 물놀이를 할 수 있다(아래).

산촌유학은 방학 때 한 2주~2개월 단위로 열리는 생태체험 캠프나, 학교의 틀을 벗어나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는 대안학교와 다르다. 학기 중에 농가 근처의 분교에서 그곳 아이들과 함께 공교육 수업을 똑같이 받으면서도 방과 후엔 자연 속에서 실컷 놀 수 있다. 서울 대치동·중계동이나 경기도 분당·일산 등 소위 교육열이 높은 곳에서 많이 찾아온다. 한드미 마을에 유학 중인 태학(12)의 경우 사교육 일번지라는 대치동에서 왔다. 중상위권 성적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없던 태학이는 아빠와 컴퓨터로 산골 마을을 보다 “와, 이런 데 가서 살고 싶다”고 해 유학을 왔다.

아직은 프로그램이 초등학생 중심이고, 유학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사이다. 현재 초중등교육법상 3개월까지는 ‘도농 교류’라는 명목으로 전학 없이도 시골 학교와 체험 교류를 할 수 있게 돼 있지만 그 이상이기 때문에 전학 절차는 밟아야 한다.
아이들의 일정은 도시에서만큼이나 빡빡(?)하다. 오전 7시에 일어나 오후 9시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끝난다. 오전 9시~오후 3시는 학교에서 보내지만 방과 후는 모두 자연과 함께다. 동굴 놀이, 계곡 물놀이, 꽃 따기, 요리하기, 자전거 타기, 야구 등 할 일은 많다. 한드미 마을에는 물레방아·자연동굴·한드미 계곡 등 생태학습 체험관이 있고, 고산센터와 철딱서니학교는 마음 수련과 관련된 요가와 명상, 예술치유(미술·음악 등) 프로그램 등이 마련돼 있다.

이런 프로그램만으로도 너무 바빠 아이들은 학원을 다닐 틈이 없다. 컴퓨터 오락, TV, 휴대전화도 곧 재미없어 한다. 피자나 프라이드 치킨 대신 봄에는 산나물을 뜯어 먹고, 가을에는 감자를 구워 먹는다.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부모를 너무 그리워하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1년이란 기간도 짧아 한다. 한드미 마을에 올 3월 입소한 막내 승완(7)은 “개구리 알 잡는 게 너무 신나 더 있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가 함께 이사와 생활하는 덕치초등학교 외에는 모두 마을회관 등을 개조한 기숙사 같은 곳에서 단체생활을 한다. 한드미 마을의 경우 이장 부부가 함께 살며 아이들을 돌본다. 월 평균 50만원을 내면 숙식과 빨래·간식 등을 해결해준다. 매 학기 전 방학에 환경운동단체인 ‘생태산촌만들기모임’(02-747-6009)이 산촌유학 박람회를 통해 공고하고 지역마다 10여 명을 모집한다. 정원이 채워지지 않은 센터에는 수시 입소도 가능하다.

산촌유학을 보내려면 먼저 단기 방학 캠프를 통해 아이가 농촌 체험을 좋아하는지 확인하고 시작하는 게 좋다. 김용택 교사는 “아이가 싫어하는데 부모가 억지로 보내는 경우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충고했다.

일단 유학을 보낸 뒤에도 잘 적응하도록 부모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준호·찬호 형제의 아버지 고현구씨는 “놀토마다 아이들을 보러 가는 건 물론 수시로 전화하고 자전거·롤러브레이드·책·옷 등 필요한 물품을 택배로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한드미 마을의 김동주 사무국장은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농촌 생활의 큰 틀을 깨지 않는 수준의 물건은 보내도록 허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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