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성숙한 민족감정을 지니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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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광복 50주년.긴 세월이다.우리가 곧잘 쓰던 일제(日帝)통치36년보다 훨씬 긴 세월이다.사람으로 치면「하늘의 命을 알게 되는」성숙한 나이다.
광복이란 말은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을 되찾는다는 뜻인데,이 말에 걸맞게 우리는 50년동안 민족이 빛을 되찾은 땅에서 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므로 이 50년동안을 관류하는 주된 의식형태가 민족우선을강조하는 민족감정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둠의 시절,그리고 남의 나라의 원조로 살아가던 시절,민족을떳떳하게 자랑하기가 쉽지 않았던 우리는 민족이라는 두 글자를 앞에 붙이면 그 내적구조를 깊이 살필 여유를 잃고 우선적으로 그 당위성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해방 초기에 어떤 정치세력이「민족지상.국가지상」을 정치목표로내걸었어도 그 자체로서는 시비하려 들지 않았다.이렇게 민족을 앞세워 50년동안 힘들게 걸어오면서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다.경제성장도 어느정도 이루었다.
비행기안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면세품을 사면서 외국돈 아니면 그것들을 살 수 없었던 지난날을 생각해 민족적 긍지를 느꼈다고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리고 그런 말은 상당한 공감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50년이 지난 오늘,선진국 진입의 문턱에 다다랐다는 오늘,주변을 한번 돌아보자.해방초기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민족이 너무 범람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며칠전 외국의 우주기지에서 외국회사에 맡겨 통신위성을 발사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던 아나운서는 발사의 성공이 민족의 긍지를 드높이는 것이란 뜻의 표현을 감격어린 어조로 말하고있었다. 우리가 돈을 댔고,위성 제작과정에도 얼마간 참여했다 하니 그 발사가 민족의 우수성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그 발사과정이 과연 민족이라는 단어와 연결지어 말할 성질의 것일까. 더욱이 그때는 발사는 했지만 정상적인 궤도진입 성공 여부는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궤도진입에 난점이 생기면 그민족의「긍지」는 어디로 갈까.
문제는 한 아나운서의 말실수가 아니다.앞에서 말한대로 민족이란 수식어만 붙이면 아무도 그 말뜻을 따져보려 하지 않는 이 사회의 정신적 풍토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다.
북한을 방문한 어는 한국계 미국인 교수가 북한학생과 비교적 솔직한 대화를 했다.그 교수가 미국대학의 교수라는 것을 안 북한학생은『미국놈들을 가르치다니 조선민족은 정말 우수하군요』라고말했다 한다.민족이란 단어가 남용되기는 북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본시 민족 또는 민족주의란 학문적으로도 정의하기 까다로운 개념이다.민족의 자유를 위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쳤는가 하면민족의 이름으로 보스니아에서는 인종청산도 자행되고 있다.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이 이렇게 까다로우니 만큼 그것을 쓰는 데는 신중한 고려가 따라야 한다.민족의 자유가 속박당하고 있을때와 그 단계를 지나 보다 성숙한 단계에 다다라야 할 때는 그쓰임새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앞의 경우에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그 다음단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 효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 민족이 우수하다고 주장할 때 다른 민족도 우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성숙성,어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수한 한국인이 입상하면 다른 부문에서는 어느나라 사람이 입상했는가도 아울러 보도해주는 성숙성,일본(日本)이 우리에게 지 난날 한때 불행한 관계가 있었다는 모호한 말을 하는 것에 대해 분개할 때동시에 우리의 외무장관이 베트남의 외무장관에게 거의 같은 말을하는 것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해보는 성숙성이 이제는 필요한 단계에 우리는 와있지 않을까.
〈서울大교수.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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