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프라이드 ① 다저스타디움에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야구 칼럼 ‘베이스볼 프라이드’가 이번주부터 연재됩니다. 기존 정영재 축구팀장의 축구 칼럼 ‘웰컴투풋볼’과 함께 화요일마다 격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석희 전문기자 등 본지의 베테랑 야구 기자들이 만드는 야구 칼럼은 야구를 읽는 재미와 깊이를 더해 드릴 것입니다. 축구와 야구는 한국 스포츠의 흥행을 이끄는 양대 축입니다. 그만큼 팬들도 많고 관련 기사를 읽는 독자층도 두텁습니다. 본지 중견 기자들의 칼럼을 통해 스포츠의 묘미를 더욱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바랍니다.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역사는 박찬호의 역사이고, 다저스타디움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박찬호가 1994년 4월 9일 애틀랜타를 상대로 빅리그 데뷔전을 치른 곳도, 이후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96년 4월 12일 플로리다전에서 데뷔 후 첫 선발승을 따낸 곳도 LA 다저스타디움이다.

박찬호와 김병현(당시 애리조나)이 2001년 6월 21일 나란히 마운드에 올라 맞대결을 펼친 곳도 다저스타디움이고, 박찬호에 이어 두 번째 다저스맨이었던 최희섭이 2005년 6월 13일 미네소타전에서 한 경기 3홈런을 날리며 ‘코리안 파워’를 자랑한 곳도 바로 이 다저스 안방이다.

다저스타디움은 한국 야구팬들에게 홈구장이나 다름없었다. 다저스가 이겼을 때는 한국 팀이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박찬호와 다저스 구장은 그렇게 우리에게 친근했다.

2002년 9월 이후 5년 반 만에 기자는 다저스타디움 프레스 박스에 앉았다. 시간은 훌쩍 흘렀지만 구장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59년째 마이크를 잡은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의 중계방송도 그대로이고, 88년 이후 20년째 ‘Take Me Out To The Ballgame(나를 야구장으로 데려가 주오)’을 연주하는 낸시 비 헤플리 여사의 오르간 소리도 여전히 정겹다.

하지만 허전하다. 더그아웃에 있어야 할 ‘선발 투수’ 박찬호가 없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일본인 구로다와 대만 투수 궈훙치가 앉아 있다. 관중석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와 청천백일기가 펄럭인다. 한류(韓流)는 사라지고 일류(日流)가 들어왔고, 중화(中華) 바람이 휘몰아친다.

박찬호는 외야 담장 너머 불펜에 갇혀 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조 토레 감독의 지시가 없으면 그 벽을 넘을 수 없다. 5일마다 등판하는 선발 투수와 달리 불펜 투수는 무작정 기다려야 하고 허탕을 치는 날도 숱하게 많다. 내키지 않지만 어떤 때는 지고 있을 때도 나가야 한다.

14일 다저스 구장에서 만난 박찬호는 “선발 투수가 좋다. 불펜에 있는 것은 정말 불편하다”면서 “하지만 서서히 적응 중”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박찬호는 “기죽지 마세요”라며 되레 안심시키려 든다. 배리 본즈에게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내주고도 당당함을 잃지 않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하지만 홀쭉하게 여윈, 가늘고 기다란 그림자가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이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죽지 말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일 수도 있다.

올 시즌 박찬호는 상승세다. 비록 불펜에 있지만 벌써 3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이다. 조만간 벽을 넘어 제자리인 선발로 돌아올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때까지 파이팅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석희 야구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