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홍구칼럼

한·미 정상회담과 남북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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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는 미국이 주도한 20세기의 역사적 변천과정에서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으며 60년 전 자유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온 지정학적 원리를 뛰어넘을 만큼 한·미 동맹관계가 탄탄하였기에 이것이 가능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 대륙 동북부의 전부, 즉 러시아·중국·베트남, 그리고 북한이 모두 공산 치하에 들어간 압도적 힘의 불균형을 견뎌내며 오직 한반도의 남쪽에 홀로 남은 대한민국만이 자유민주공화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이변은 한·미동맹이란 특수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분하고 억울한 결과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북한은 세계사의 대세를 외면하고 냉전과 대결의 시대가 시장과 개방의 시대로 전환된 후에도 한반도를 역사의 예외지대로 묶어두는 폐쇄와 고립을 택함으로써 국제경쟁에서 ‘잃어버린 20년’이란 고통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주었다.

북한이 잃어버린 첫 번째 기회는 20년 전, 즉 1989년 독일 통일로 상징되는 냉전의 장막이 내려지던 시기였다. 새로운 화해의 시대, 개방과 시장의 시대에 적응하려는 우리의 적극적 노력은 90년 한·소 수교, 92년 한·중 수교, 그리고 그 시절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시대 전환에 적응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마땅히 ‘교차 승인’, 즉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로 이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화란 시대적 흐름과 역행하는 ‘우리 식’ 및 ‘우리 민족끼리’만을 고집하는 자충수를 택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려 핵무기 개발이란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바로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인 셈이다.

북한이 세계적 흐름에서 고립된 예외지대로부터 탈피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는 6·15 선언과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까지 진전시켰던 2000년 말께 찾아왔다. 하지만 미국 대선과 정권교체를 의식하였는지 북한은 개방의 선택을 뒤로 미룬 채 북·미관계 개선의 호기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는 놓쳐서는 안 될 세 번째 기회가 찾아오고 있는 것 같다. 어렵사리 마련된 6자회담의 틀 속에서 합의된 북한의 핵 불능화, 핵 신고, 핵 폐기의 수순을 밟아가야 할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찾아 온 것이다. 바로 이러한 중대한 고비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첫째로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는 한·미 간의 신뢰 회복이다. 북한의 개방보다는 고립과 폐쇄를 조장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환상에 우리가 동조하는 듯 보였다면, 그리고 그것이 한·미동맹의 기반을 흔드는 반미 감정으로 이어졌다고 오해되었다면 이번 정상회담이 이를 해소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둘째는 튼튼한 한·미관계의 복원을 토대로 남한·북한, 그리고 미국의 삼각관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른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에 우리는 더 이상 과민 반응할 필요가 없으며 북·미 간의 대화로 북한의 비핵화를 마무리짓고 개방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 설사 우리가 그 대화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크게 개의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한반도의 예외지대화와 한민족이 ‘역사의 고아’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라면 북한의 결단을 촉구하며 더불어 도울 수도 있다. 하나의 시장 속에서 다원화된 여러 체제가 평화와 번영을 함께 추구하며 공존하는 것이 세계사의 대세다. ‘비핵·개방·3000’이란 전략도 남북한과 4강의 교차승인이 이루어져 한반도와 한민족이 역사의 주류에 복귀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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