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성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의 전유물이던 불을 프로메테우스가 훔쳐 인류에게 전해 주었다고 믿었다. 그리스 신화대로라면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 절도 행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고대 올림픽 기간에 제우스와 헤라(제우스의 아내)의 신전에 불을 피워 올리는 것으로 프로메테우스의 ‘위대한’ 절도 행위를 기렸다. 그 불에 후세의 사람들은 성화(聖火· sacred fire)란 이름을 붙였다.

근대 올림픽에 성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였다. 하지만 그것은 대회기간 동안 경기장의 탑에 그냥 불을 피운 것에 불과했다. 오늘날처럼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올림피아에서 채화해 대회장까지 봉송한 것은 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처음이었다. 올림픽을 나치즘의 정치선전 무대로 활용하려던 나치 독일이 착안해낸 것이다. 그해 8월 1일 베를린의 제국 경기장. 10만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의 개회 선언으로 축포가 터지고, 이어 칠순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올림픽 찬가’를 초연하는 가운데 유럽 대륙을 거슬러 온 성화가 경기장에 도착했다. 신을 경배하고 인류 문명의 태동을 찬양하던 성화는 어느새 나치의 체제선전 무대를 밝히는 도구로 둔갑해 버렸다.

경위야 어찌 됐건 그 이후 성화는 올림픽 개막식의 하이라이트로 자리를 잡았다. 불을 성화대에 직접 옮겨 붙이는 고전적 방법 대신 불화살을 쏘아 점화하는 등의 이벤트가 속속 등장했다. 성화를 전자 펄스로 변환하고 인공위성을 경유해 지구 반대편에서 레이저빔으로 되살려내는 첨단 기법도 사용됐다.

성화 봉송 또한 나날이 거창해졌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는 그동안 올림픽 개최와는 거리가 멀었던 아프리카를 포함해 세계 전 대륙을 누비는 성화 봉송이 시작됐다. 강풍을 만나 성화가 꺼지는 사고가 몇 차례 있긴 했지만 그동안의 성화 봉송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인류 평화의 축전을 밝히는 횃불에 감히 누가 찬물을 끼얹겠는가.

그러던 것이 올해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성화가 가는 곳마다 티베트 사태 진압에 대한 항의 시위대의 타깃이 되고 있다. 파리에선 성화 불씨가 세 번이나 꺼졌고 샌프란시스코에선 봉송 주자가 창고로 피신해야 했다. 개최국이 올림픽을 체제 선전장으로 활용했던 사례들과는 반대로 시위대들은 성화 봉송을 저항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올림픽과 정치의 질긴 인연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셈이다.

불상사가 잇따르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차기 런던 올림픽부터 해외 성화 봉송을 폐지하는 문제를 검토한다는 소식이다. 이러다간 풍전등화(風前燈火)란 성어가 풍전성화(風前聖火)란 신조어로 바뀌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