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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퀴즈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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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면

“그렇게 많은 상금을 주는데, 인생의 의미 같은 걸 문제로 내야 하는 거 아냐?”(영화 ‘퀴즈쇼’에서).아니다.
그런 문제가 안 나오기 때문에 당신도 도전할 수 있다. 도대체 인생의 의미 같은 걸 누가 맞힐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북한 인공기에는 별이 그려져 있다’라든가 ‘국회의원은 탄핵될 수 없다’ 같은 명제가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은 일정 이상의 상식과 지식이 있으면 맞힐 수 있다. 퀴즈쇼는 그런 것이다.

“아, 나도 저런 건 맞힐 수 있는데”에서 “야, 저런 것까지 맞히다니”로 나아가는. 맞힐 수 없을 것만 같은 비범하고 희귀한 지식을 과시할 때 보통 사람은 영웅으로 거듭난다. 그러니 당신도 영웅이 될 수 있다(참고로 앞의 두 명제는 둘 다 참이다).

신화시대부터 퀴즈는 인간과 함께해 왔다. 스핑크스는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내고 못 푸는 행인을 잡아먹었다. ‘사람’이라고 정답을 맞힌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되었다. 퀴즈에 능통한 자가 현자(賢者)로 떠받들여지고 실리와 영예 양쪽으로 보상받는 속성이 그때부터 통했던 것이다.

현대에 등장한 TV 퀴즈쇼는 보통 사람의 욕망이 넘실대는 곳이다. 아는 것을 아는 체하고 싶고(현시욕), 수준이 비슷한 상대와 겨뤄 보고 싶고(승부욕), 우승을 통해 상금과 인지도를 확보하고 싶은 욕망(물욕·명예욕)의 장소다. 소박하게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싶고, 아이들에게 멋진 아빠가 되고 싶고, 지인들에게 몰랐던 모습을 깜짝 선사하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잔치다. 그래서 그들은 퀴즈쇼에 나간다. 버저를 누름과 동시에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훑는다. 태양처럼 조명이 빛난다. 지금 막 나만의‘쇼’가 시작되려 한다.

보통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드라마
녹화 30분 전, 긴장한 얼굴들이 대기실에 앉아 있다. 꼼꼼히 적은 노트를 넘겨가며 마지막 복습을 한다. 대입 수능시험 못지않은 초조함. 1일 찾은 KBS1-TV ‘퀴즈 대한민국’의 녹화현장 풍경이다.정통 퀴즈쇼로서 7년째 장수하고 있는 ‘퀴즈 대한민국’은 보통 사람의 영웅 신화로 성공한 프로그램이다. 열쇠수리공·주부·퇴역군인 같은 ‘우리네 이웃’이 놀라운 실력을 보이며 최고 상금을 거머쥐었다. ‘퀴즈 영웅’의 칭호와 함께 수천만원의 상금을 차지한 이는 현재까지 35명. 요즘도 격주로 치르는 예비시험에 200명 안팎의 응시자가 몰린다. 이들 중에서 매주 6명만이 본선에 올라 TV에 얼굴을 비춘다.

TV 출연의 기쁨, 상금이라는 떡
“퀴즈 프로를 원래 좋아해요. 저런 문제는 나도 다 맞힐 수 있겠다 싶어 출전했죠.”(고교 2년 양정환)
“사람으로 나서 이름 한번 알려봐야죠. TV 출연으로 병원 홍보도 하고요.”(치과의사 김동현)
“승부가 스릴 있잖아요. 어린 아들과 같이 왔는데 좋은 추억이 될 것 같고요.”(연극배우 심영민)

퀴즈쇼 출연자들은 애초에 퀴즈쇼 팬이었던 경우가 많다. TV를 보며 곧잘 맞히다 ‘그냥 내가 나가봐’ 하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다. 가족·친구들과 함께 추억거리 삼아 응시하기도 한다. ‘1대100’처럼 한꺼번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일수록 더하다. TV 출연으로 ‘반짝 유명인’이 되고픈 욕심을 한쪽에 품고.

상금 유혹도 만만치 않다. 특히 요즘은 대부분이 상금 누적제라서, 단 한번 출연으로 수천만원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퀴즈쇼만 공략하는 겹치기 참가자들도 많다. 이런 경우는 제작진이 알아서 거른다. 다만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했더라도 수개월이 지나면 문호를 열어준다.

‘장학퀴즈’ 기장원과 ‘퀴즈 아카데미’ 7주 연승을 해냈던 ‘퀴즈왕’ 송원섭씨는 사람들이 퀴즈쇼에 출연하는 이유를 “아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잡식이 많은 사람이 주변에 아는 체를 하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잖아요. 멍석을 깔아준 자리에서 마음껏 실력을 뽐낼 수 있으니 퀴즈쇼에 나가는 거죠.”

통과 ‘성적순’이 아니다
퀴즈 참가자들은 종종 “예심 통과가 더 어렵다”고 토로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본선 출연자를 결정하는 예심은 ‘성적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가자들 사이에 실력 차이는 그다지 없어요. 일정 이상 수준만 되면, 성별·연령·직업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본선 출연진을 안배합니다.”(‘퀴즈 대한민국’ 안희구 책임 프로듀서)

일요일 아침,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남녀 직업인이 한자리에서 퀴즈 실력을 겨루는 화면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이러다 보니 예심을 통과했을지라도 TV 본선 출연까지 몇 주 내지 몇 개월을 기다리기도 한다. 제작진이 원하는 ‘그림’ 속 인물로 선택될 때까지 말이다.

안 CP는 “퀴즈 프로그램의 목적은 ‘재미’를 주기 위한 것”이란 걸 강조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팽팽하게 승부를 이어갈 때 가장 흥미롭잖아요. 시청자도 출연자와 동일시하면서 스릴과 성취감을 느끼고요.”

이를 위해 ‘퀴즈 대한민국’은 1라운드에 한해 난이도 조절을 한다. 10대에겐 쉬운 ‘상식’이 60대에겐 어려울 수 있고, 은행원에게 까다로운 문제가 주부에겐 기초적일 수 있다. 이를 감안해 6명에게 골고루 ‘상·중·하’를 배분한다. 열쇠수리공이나 대학 교수나 2라운드 진출 가능성은 엇비슷한 셈이다. 대신 2라운드부터는 어떠한 안배도 배려도 없다. 말 그대로 진검승부다.

향해 준비된 쇼
숱한 사람이 우승하고 싶은 이유를 말한다. 셋방살이 하는 신혼부부는 생활비를 마련하고 싶고, 투병 중인 아버지께 기쁨을 주고 싶다는 아들도 있다. ‘장학퀴즈’ 10기 기장원 출신이자 1980년대 말 ‘중학생 퀴즈’를 진행했던 강성곤(숙명여대 겸임교수) KBS 아나운서는 “진행자는 출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각자의 사연을 끌어내고, 긴장감 있게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시청자가 몰입할 수 있는 드라마를 엮어가는 것이다.

드라마를 위해선 문제 난이도 조절이 중요하다. 안희구 CP는 “난이도 조절에만 작가·조사자 등 10여 명이 하루 종일 매달려 회의한다”고 밝혔다. 팽팽한 승부 끝에 이길 만한 사람이 이겨야 보는 재미가 있다. 1대1 대결에서 한쪽으로 쉬운 문제가 쏠리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고, 프로그램 전반을 봐도 쉽거나 까다로운 문제가 적절히 배치돼야 한다.

문제 수집은 작가들의 몫이다. 시사와 연관시키되 기출 문제를 피해서 낸다. ‘퀴즈 대한민국’을 1회부터 함께한 오현주 작가는 “일상의 어떤 것도 허투루 보는 법이 없다”고 귀띔한다. “마트에서 두부를 사다가도 포장지에 적힌 소포제가 뭐지? 하는 식이죠.” 보통 회당 100여 개의 문제를 준비하는데, 출제 전 반드시 외부 전문가들의 감수를 받는다. 보안을 위해 녹화 전까지 ‘비밀 뱅크’에 깊숙이 숨겨둔다.

진 영웅이 주는 ‘꿈’
‘퀴즈 아카데미’ 7연승과 ‘퀴즈 대한민국’ 우승을 했던 배경택(39·보건복지부 사무관)씨는 “우승 비법은 없다”고 말한다. “늘 신문을 정독하면서 시사 이슈와 일상의 화제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죠.” 그는 또 ‘퀴즈는 로또와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알고 남이 모르는 문제가 나와야 이기는 거잖아요. 실력만큼 운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퀴즈 대한민국’ 제작진은 “퀴즈를 즐기던 사람이 결국 이긴다”고 입을 모은다. “상금에 눈독 들이고 출연하는 분들보다, 원래 퀴즈를 좋아하고 늘 접하던 분들이 잘 되더라고요. 사회 경험이 풍부하고 연륜이 많을수록 잘하시는 것도 같아요. 평정심을 유지해 제 실력을 발휘하니까요.”

영화 ‘퀴즈쇼’(로버트 레드퍼드 감독·1995)는 60년대 미국 NBC 방송사 퀴즈프로그램 제작진이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출연자와 공모해 승부를 조작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놀랍게도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퀴즈쇼의 성립 근거가 무너진 어처구니없는 경우다. 안 CP는 “아무리 재미를 목적으로 한대도 승부 조작은 있을 수 없다. 결국 이길 만한 사람이 이겨야 프로그램이 오래 가는 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퀴즈 프로를 기획하는가’는 방송사의 몫이다. 그리고 요즘 퀴즈 프로그램은 종전의 엘리트 위주의 지식 경연에서 누구나 해볼 만한 상식 베팅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무작위로 섞어놓은 듯한 8명 출연자의 공통점(예컨대 서울대 출신)을 찾게 하는 SBS ‘공통점을 찾아라’라든가, “장윤정의 노래 ‘어머나’에서 당신을 처음 만나는 장소는?” 같은 문제가 출제되는 KBS2 ‘1대100’ 같은 프로가 그렇다. 지식이 아니라 상식을 꿰는 직관이 우선시된다.

정통 퀴즈프로그램은 아닐지라도, 이런 퀴즈쇼 또한 보통 사람을 영웅으로 만든다. 지식 영웅이 아니라 ‘억세게 운이 좋은 영웅’으로. 그런 프로그램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 시대가 갈망하는 영웅이 그런 모습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대박의 꿈’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글=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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